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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3·15 부정 선거와 3·15 의거

by 푸른바다99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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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 선거와 3·15 의거

 

<3·15 부정 선거>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지휘 아래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 선거를 준비했다. 전국 경
찰의 주요 간부는 모두 맹목적 충성 인물로 교체되었고, 야당 의원들을 향한 집요한 분열 공작이 펼쳐졌으며, 정치 깡
패 등을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했다. 일반 공무원은 물론 교육 공무원들까지 부정 선거 운동에 투입하고 담
임 교사가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 권유하려고 가정 방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자,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한 정부
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조병옥 후보는 미국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선거가 한 달 남은 2월 15일 심장 마비를 일으켜 서거했다. 이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해졌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3·15 의거>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시민들과 학생들은 선거의 무효를 주
장하며 규탄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해 약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수의 시민
과 학생을 검거하고 감금했다. 또한 자유당 정권은 시위에 공산당이 개입했음을 주장하며 시위대를 위협했다. 


 1960년 4월 11일 1차 발포 때 행방불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죽음으로 격분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재궐기해 자
유당 정권을 규탄했다. 결국 마산 시위로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 단위로 확산되었으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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