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도 몰살한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의 외척 숙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가 왕좌에 오르는 모든 과정 자체가 극적인 드라마고 노바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인물인데요.
그는 이성계의 오남으로 형이 4명이나 있었고 조선의 계국에 큰 공로가 있지만
아버지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한참 동생이며 계모의 소생으로 세자가 된 이방석과 조선의 실세 정도전 등을 모두 죽이고 옥좌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둘째 형인 방과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방과는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시간이 지나 양위를 받으며 정식으로 조선의 3대 국왕이 되었죠.
우선 이방원에게는 공신들보다도 가장 확실한 조력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원조 민비 태종의 아내 원경왕후였죠.
후대인 세종대왕의 어머니이기도 한 원경왕후는 고려 말 강력한 권문세족인 민제의 딸이며 18세에 2살 어린 이방원과 혼인했습니다.
민재는 이방원의 스승이며 장인이 되었고 이성계가 일개 장수에서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더더욱 거물이 되었죠.
이 원경왕후 민 씨는 동생인 민무구 민무지를 끌어들여 이방원을 돕게 하고 1차 왕자의 난 때 대궐에 있던 이방원을 자신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여 불러내 거사를 종용하고 친정으로 빼돌려 놓은 무기들을 풀어 이방원의 사병들을 무장시키기도 했습니다.
2차 왕자의 난 때는 집안의 말이 혼자 돌아오자 이방원이 패한 줄 알고 창을 들어 자신도 나가 싸우다 죽겠다고까지 한 일화도 있죠.
이처럼 민 씨는 단순한 이방원의 반려자가 아니라 강력한 집안의 후원자 격이기도 했으며 참모 격이기도 할 정도로 이방원의 공신들에게도 부족함이 없는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의 난을 모두 성공시킨 이방원이 임금이 되면서 결국 민 씨도 왕비가 되었는데 이방원은 왕이 되자마자 궁녀들과 놀기 시작했고 민 씨와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죠.
태종은 바가지를 견디다 못해 왕의 후궁 제도를 법제화하여 못 박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태종은 노골적으로 왕비를 멀리하는데 중국 고사에는 가난을 함께한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며 어려움을 함께한 아내를 내쳐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왕이 되고나서 태도가 싹 변하죠.
권력을 장악하고 보니 장인 어린이인 민재라는 인물은 왕의 스승이기도 했고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으며 따지고 보면
고려의 권문세족 출신으로 그때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보수파와 유학파들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처남이며 핵심 공신이었던 민무구 민무질은 엄청난 실세였죠.
누나가 궁의 안주인이기도 했고요 또 당시 원자였던 이제 즉 훗날의 양녕대군은 어릴 적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삼촌인 민 씨 형제와는 아주 가까웠습니다.
민씨 가문에 대한 태종의 경계심은 날카로워졌고 눈치 빠른 이제는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민 씨 형제들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죠.
태종은 중간에 한 번 어린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며 선의 파동을 일으켰는데 신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열흘 정도 소란이 일어났지만 결국 이 쇼를 접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태종의 삼촌 이완은 민무구 민무지를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데 태종이 선의를 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슬퍼하며 반대했는데 그 둘은 기쁜 표정을 지었고 선의의 뜻을 거두자 실망한 얼굴을 하였다는 상소였죠.
거기다 왕이 던진 질문에 세자 외엔 영특한 아들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 부분이 다른 왕자를 제거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고
다른 대신들에게 언급한 태종에 대한 불만적 발언들이 폭로되면서 처단하라는 대간들의 상소가 올라오게 되고 큰 위기를 맞게 되지만 태종이 이 일은 나중에 처리하겠다며 이들을 유배 보내는 선에서 일단락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민재가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빼어난 사위를 둔 덕에 정승도 해보고 고려와 조선 두 나라에서 실세가 되었던 그였지만 덧없이 떠나게 됐는데 어찌 보면 다행입니다.
그는 앞으로 민씨 가문에 닥칠 거대한 폭풍을 보기 전에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노박구 산하의 태종은 본격적으로 움직입니다.
이후 윤목과 정안지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민씨 형제가 버림받았고 다른 공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를 들은 밀고자가 중앙에 보고해 민 씨 형제가 세자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혐의까지 받게 되었죠.
이 와중 공신이었고 정승까지 역임했던 이무도 처형당하고 구 민무질은 먼 제주로 유배를 떠났지만
신하들은 모두가 다 민씨 형제를 처벌해야 함을 말했고 결국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자결을 명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밌는 것은 양년대군 역시도 삼촌들의 처벌에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원경왕후는 대놓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고 태종의 성격상 개김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민씨 가문의 힘은 더더욱 줄어들었습니다.
민재의 다른 아들인 민무의 민모 휠까지도 앞서 형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했다가 걸리게 되고 심지어 양년대군조차도 두 형제가 과거의 세자께선 어느 집안에서 자라셨습니까 라고 호소한 사건을 태종에게 고함으로써 민무회야 민무율까지도 자결을 명받게 되고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민재는 집안이 풍비 확산 나는 걸 보지 못했지만 왕후의 어머니이고 왕의 장모인 송 씨는 고령의 아들 4형제가 모두 사위의 손에 죽는 이 비극을 보게 됩니다.
이방원은 빠꾸 없이 앞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형제까지도 비정하게 살해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 공신들 역시 무자비하게 제거했죠.
하륜과 조영무 같이 무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거의 이숙번 이무 등
주요 인사들을 숙청하면서 또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가였던 민 씨 집안은 철저하게 제거했습니다.
심지어 왕비와 장모 그리고 그들의 조카인 왕자가 눈 뜨고 뻔히 보고 있는데 말입니다.
역사에서 권력은 이렇게 비정합니다. 권력을 힘으로 잡은 경우와 어떤 국가의 건국 초기에는 이러한 비극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문제가 될 것 같은 공신들과 제우들을 제거했고 홍무제 주원장은 유방이나 태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피의 숙청을 실행했습니다.
새 국가를 창업한 주 원장이 그러한 숙청을 감행한 것은 국가의 안정과 후계 구도를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한 태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정과 확실한 후계 구도였습니다.
어떠한 면에서 태종의 진짜 업적은 많은 준비를 한 상태에서 후계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일이라 평하는 사람들도 많죠.
태종은 제상 위주의 조선 초기 정치 체제를 군주 위주로 돌려놓았으며 이후 조선의 기틀을 닦은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정하고 잔인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데 사실 태종의 권력 장악과 중요한 승부점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점은 바로 그의 카리스마적 인품과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에 있습니다.
민 씨 가문의 비극은 그의 성품과 국가의 방향으로 봤을 때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용할 것은 이용하고 또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털어내는 것 현실의 정치인들에게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요.
또한 그렇게 처가를 멸문시켜버린 노바구 사나이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는 죽어서 사이좋게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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