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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고려왕족들의 비참한 최후

by 푸른바다99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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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인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은데 조선 건국 후 고려 왕족들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요?

고려의 34대 왕이자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었습니다.
공양왕은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세운 꼭두각시 왕으로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
정도전 일파의 반격을 준비했으나 공양왕을 보호해주던 정몽주가 철퇴를 맞아 죽으면서 공양왕을 지켜줄 보호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공양왕은 그럼에도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려을 합니다. 공양왕은 이성계와 동맹 관계를 체결하겠다는 교서를 작성합니다.

왕과 신하 사이에 동맹이란 말이 논리저으로 맞지 않습니다만,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윤리적 프레임을 씌워 감히 왕을 폐위시키지 못하도록 말 같지도 않은 조서를 만들어낸 겁니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무리들은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비 안 씨를 찾아갑니다.

정비 안씨는 공민왕의 후궁으로 당시로 왕실 지위가 가장 높은 대비였고 조선 건국파 신하들에게 압박을 받아 공양왕 페위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공양왕도 차라리 왕위에서 물러나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공식적으로 로 퇴일을 선언했습니다

고려 왕조의 호흡기를 뗀 정비 안 씨는 조선 정부에 의해 노후를 보장받았지만 본인의 손으로 고려 왕조를 절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늘 술에만 의존하다가 세종대왕 재위 10년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공양왕은 공양 군으로 강등당하고 원주에서 노후를 보장받습니다.
하지만 공양왕은 그 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하기 힘든 꺼림찍한 일들을 해결해 준 해결사는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정도전은 정몽주를 따르던 56명을 가장 대립하고 정몽주의 최측근들이었던 8명에 대해서는 권장 100대 형이 떨어졌죠. 8명 전원 사망합니다. 참고로 권장 백대형은 이성계의 허락 없이 정도전이 자의적으로 진행시켰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태조 이성계는 당황한 기색을 나타냈으나 쉬쉬 묻어버렸습니다.

그 다음 칼은 고려 왕실 왕족들에게 향하게 되는데요.

위에 오르고 바로 이틀 후 정도전은 고려 왕실의 왕족들을 전부 찾아내어 강화도
거제도로 보냈습니다.

강화도나 거제도나 바다 경치가 예쁜 관광지이지 그 당시에 들은 정말 살기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393년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의 동생을  자기는 결코 고려 왕족들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다며 섬에 있는 고려 왕시들이 다시 육지에서 살 수 있게 선처를 해주었죠

조선이 건국되고 2년 후였던 1390 4년 박중질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경남 밀양에서 맹인 점쟁이이 홍모를 찾아가 조선의 이 씨와 고려의 운명에 대해 점을
봤다고 합니다.

이 맹인 점쟁이가 폐위된 공양왕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대신 옛 고려
왕실의 종친이었던 왕 화 왕 거의 왕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발각이 됩니다.

먼 경남 땅에서 김가인 박중질 등이 왕화왕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정도전의 정보망에 걸렸다는 것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전국적으로 고려 왕씨와 타인의 접촉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아마 곳곳에 정보원 파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정도  치밀함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일이죠. 김가인 박 중지 왕화 왕과 사인은 수원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결국 참수되었습니다.

솔직히 왕화 왕권은 점쟁이 입에서 거론된 죄밖에 없는데 여하튼 이런 불미스러운 있자 조정 대신들이 궁궐 문 밖에서 고려 왕족들에 대한 처벌과 공양왕의 사형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버젓이 살아 있으니 고려보기 운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디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겠습니까

몇명이 뒤에서 사람있었겠죠.

태조 이성계가 대신들을 뒤에서 움직이게 사주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갓 한 국가의 1대 왕이 태조 이성계가 독단적으로 전 왕실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주도해서는 안 됐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했죠.
그리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본인인 줄을 정확하게 알았던 정도전은
1인자의 손에 결코 피를 묻히게 하지 않았죠.

태조 이성에는 공양왕을 포함 고려 왕실의 왕씨들을 전원 강화도 거제도 그리고 지금의 강원도 3적으로 다시 보냅니다.

이 중 공양왕 아니 공양 군은 삼척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양군을 삼척까지 후송하는 임무를 맡은 중추원부사 정남진은 공양군이 삼척에 도착했을 때 동양군과 그의
아들들은 목 졸라 죽였습니다.

강화도 쪽 후손 인물을 맡은 성주 전선 윤방경은 지금의 김포시에서 강화도로 넘어가기 직전에 바다 강화나루의 왕실들을 던져 죽였으며 거제도 쪽 후송 임무를 맡은 손흥 거제도로 가던 중 배에서 왕시들의 바닷가가 던져 죽여버렸습니다.

거제도 앞바다에서 익사당한 고려 왕씨들의 규모는 어느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력하다고 편된되는 왕 씨들은 아마 전부 바닷가에 빠져 죽었을 거라고 합니다.

조선 정보 편을 들어야 하는 왕족 실록에서조차 왕씨들이 바닷가에서 빠져 죽었다는 내용을 적을 정도이니 실제로는 꽤 많은 수가 희생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1394년 4월 20일 조선 왕조 신록 태조 신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이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은 모두 처형했다.

왕실 색출 작업은 이날 한 번 하고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왕 씨가 발견되기만 하면 적법한 절차 없이 곧바로 교사령이었죠.

살아남은 왕 씨들은 어떻게 살고자 바라케야 했을 것이며 그 중엔 성이 왕자
에다가 점 하나를 찍어 옥시로 성을 개 칭한다든지 혹은 양 옆에 선을 붙여
이 전시로 성을 개칭하여 겨우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으며
왕실을 유지한다고 해도 근근히 겨우겨우 세상에 본인의 존재 자체를 숨기며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전주희 씨가 대한민국에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연속했던 고려도 주희 씨 못지 않아 전국적으로 많았을 거라고요 그리고 지금 전주 씨도 다 같은 조선 왕실의 로열 패밀리가 아니다.
조선 광 중국 초에도 왕 씨는 왕씨이지만 로열 패밀리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고려 왕실과는 하등권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거 따지지 않고 개국초 조선 정부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1413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고도 13년이 되던데 태종 이방원은 고려 왕실에 대한 색초 및 처형 작업을 중단하겠다는 교서를 공식 반포합니다.
그 전까지 계속해서 고려 왕실 색출이 진행되었다는 뜻이 20년간이나 왕씨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태종 이방원 때 고려왕족이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조선의 5대 왕 종대에 이르러 이 문종이 고려 왕실 조상들에 대한 재산 허용해 주면서
비로소 왕씨들도 사람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역사에는 훈훈한 해피엔딩을 찾기
썩 쉬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조선의
대국은 고려의 케케묵은 귀족 사회를 와해하고 실력 중심의 성리학 국가로 넘어간다는 거창한 역사적 의의를 두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예쁠 수만
없는 추악하고 인간미 없는 음지의 일들도 수도 없이 많이 자행되었답니다.

참고로 공양왕의 무덤이 삼척이 만들어졌으나 그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 이장했습니다.

어떤 사람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이 진짜 공양왕릉이라고 믿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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