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 시조는 주몽이죠. 저 북방이 부여해서 주몽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부여를 탈출해 지금의 중국 요령성 환인현인 졸본 지역까지 내려옵니다.
주몽은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인 연타발의 딸 소선호와 정략 결혼을 하면서 주몽이 이끄는 부여 유의민 세력 졸본의 토착 세력 그리고 오는 도중 합류시킨 제사 무골 무고 등이 이끄는 모든 곡 세력이 연합합니다.
이 연합이 고구려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연합해서 만든 나라는 고구려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연합해서 새롭게 탄생시킨 건 고구려가 아니라 계로부입니다.
고구려는 주몽이 새로 지은 국명이 아니고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쪽 동네를 지칭하는 지명이었죠.
당시 고구려로 불리던 지역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분포하고 있었고 주몽이 소소어와 결혼하면서 새롭게 조직한 계로부는 고구려를 구성하는 부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따라서 초창기 고구려의 역사란 주몽과 소선호가 함께 조직한 이 계로부가 다른 부족들을 통합시켜서 고구려의 유일무이한 패권 부족이 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게르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고구려에서 제일 강한 부족은 비류국이라고도 알려진 연노부였습니다.
그래서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를 보시면 본래 고구려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는데 점차 미약해져 계로부가 대신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중흥이 내려오기 전까지 고구려의 주인은 연노부였는데 중흥이 계로부를 조직하면서 이 계로부가 신흥 강자로 부상했고
주몽은 연노부까지 통합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통합이었지 멸망시킨 건 아니었습니다.
계로부와 연노부 연맹에서도 이 연노부가 계로부의 부족장을 섬기긴 했지만 연노부의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로부에서 네 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주몽이 계루부의 1대 부족장으로 있을 때 주몽의 고향이었던 부여에서 자기 아들과 2차 부여 유의민 세력들이 옵니다.
주몽은 이 2차 유의민 세력들을 이끌던 친아들 유리를 다음 후계자로 임명하려 했는데 그렇다면 왕비 소선호 등이 이끄는 토착 세력들의 입장이 애매해지겠죠.
계로부의 2대 부족장 자리를 두고 부여 세력과 졸본 토착 세력 간에 네 분이 있었고 일단은 유리가 이 경쟁에서 이겨 2대 부족장 자리를 차지합니다.
소소노 등의 토착 세력들은 고구려를 이탈하고요
아무리 유리가 경쟁에 승리하여 계로부의 2대 부족장이 되어도 경쟁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장으로서의 권위가 까지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리왕은 정치적 기반을 위해 연노부 부족장의 딸과 결혼의 연노부와 연합하고 유리왕은 졸본 토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를 졸본에서 압록강을 맞대고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합니다.
두 번째 내부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계부 1대부터 5대까지의 부족장들은 주몽의 직계 자손들로 추정되는
해시 집단이 세습을 했는데 이 6대 부족장은 계로부 고시로 바뀝니다.
이후론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로부 고시가 독점을 하게 되는데 5대에서 6대로 넘어갈 때 게르부의 유력 가문이었던 고시가 해씨를 몰아내고 부족장 자리를 찬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찬탈이기 때문에 권력 기반이 부실했을 것이고 6대 부족장이 된 태조왕은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위해 연노부와 또 손을 잡습니다.
이후론 이 계루부 내에서 친연노부파와 반연노부파가 대립을 하는데 9대 왕이었던 고국천왕은 연노부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면서 연노부 내 세력가들은 줄줄이 목들이 날아갔고 막대한 재산도 몰수되어 계로부 국고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몰수한 연노부 재산을 바탕으로 고국 천왕이 실시한 정책이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 정책인 진대법이었던 거죠.
이로써 고구려가 대통합이 되었고 계로보의 부족장이 고구려의 유일무이한 왕으로 군림한 겁니다.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국가의 기틀을 잡은 고구려는 이제 대외적으로 세력을 팽창시킬 단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위기도 여러 번 겪게 됐는데 고구려는 일단 요동반도로 진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의 북방 왕조와 부딪히게 되는데 서기 236년에는 관구왕이 이끄는 중국 위나라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고구려의 15대 왕 미천왕은 북쪽으로 요동반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남쪽으로는 한반도 내 황해도에 있던 중국의 잔존 세력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면서 3세기 경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만들게 됩니다.
더불어 황해도에 남아 있던 중국풍의 고분 벽화 문화가 고구려에 전파됩니다.
이 미천왕의 영토 확장으로 북쪽으로는 중국의 북쪽 왕조들을 자극, 남쪽으로는 백제와 패권 다툼을 해야만 했죠.
미천왕은 유능했으나 그의 아들 고국원왕은 그 영토를 지켜내기엔 역량이 부족했고 342년 중국 연나라로부터 공격을 당해 또 한 번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심지어 371년에는 백제와 싸우던 중 고국원왕이 현장에서 화살을 맞아 전사합니다.
이렇듯 4세기 고구려는 대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국가적 위기인 상태에서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리망은 아버지의 복수를 선택하기보단 민심을 수습하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는 등 내치를 다지는 일에 전념합니다. 예컨대 372년 불교를 국가 종교로 공인화하고 교육 기관의 대학을 설립해 인재들을 양성해냅니다.
373년에는 성문화된 법 율령을 반포해 고구려의 행정적 기틀을 마련해냅니다.
소수리왕의 이런 노력을 기반으로 그의 조카이자 고구려 19대 왕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 392년 즉위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동서남북 전부 쭉 뻗어나가 재위 기간 약 20년 동안 64개의 섬과 1천400개의 마을을 함락해내는 기염을 토해내죠 서쪽으로는 꿈에 그리던 요동반도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했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만주 전체를 차지했으며 남쪽으로는 원수 같았던 백제 국왕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광개토대왕이 물리적으로 멸망시킨 국가는 없었다는 거죠.
적국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게 해 자멸하게 만들거나 자연스럽게 통합이 되도록 두었습니다 고구려는 경제적인 물류의 핵심지가 되어 만주 벌판에 거주하는 그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굳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지 않고 고구려의 자발적으로 통합되는 것도 그게 더 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기 때문이죠.
413년 광개토대왕에 이어 지위한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자 20대 국왕 장수왕은 아버지가 일궈놓은 영토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더 강대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전공이 전쟁이었다면
장수왕의 전공은 외교였습니다. 장수왕은 5세기 당시 분열되어 있던 중국과의 외교에서 현실적인 중립 외교를 통해 중국의 분열을 계속 유지시켜서 동아시아 힘의 균형을 도모했죠.
더 효율적인 외교를 위해 장수왕은 427년 기존의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훨씬 더 밑으로 남하해 지금의 평양으로 수를 옮기죠 밑에 백제가 날 뛰자 장수항은 475년 백제의 수도였던 지금의 서울을 함락시켰고 심지어 지금의 충청도까지 내려갑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고구려가 독보적으로 국제 정세를 드라이브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5세기를 고구려의 전성기라고 하죠.
장수왕 이후로 고구려는 문화적으로도 찬란한 전성기를 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지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처음.
영향을 받은 고분 벽화가 이제는 고구려만의 개성 어린 벽화들로 재탄생합니다.
무용총 사신도 그림이 대표적이죠. 단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전 수도였던 국내선 기반의 귀족들과
새로운 수도 평양성 기반의 귀족들 사이에 알력 다툼이 발생한 겁니다.
이러한 내부는 장수항 사후 더욱 심각해지면서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백제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에는 지금 거련의 죄로 고구려는 어육이 되었고 백신들과 호족들의 사육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여 있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544년에는 결국 국내선 기반의 귀족들과 평양선 기반의 귀족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 2천 명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답니다.
승자는 평양성 기반의 귀족들이었죠. 비록 평양선 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고구려에는 강신 호족들이 국권을 잡고 서로 파당을 지어 편해하며 풍속을 이룬다는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두 세력 간의 신경전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내부적 어지러움을 수습한 왕이 25대 왕 평원왕입니다.
평원왕은 평양속 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래도 귀족들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니 군부 세력들을 적극 등용해 왕권의 측근 세력으로 키웠습니다.
그 상징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온달 장군이죠.
군부 세력을 왕권을 위해 키우는 방침은 평원왕의 아들 영양왕 때까지 이어졌으며 을지문덕 강인식 등의 군부 장교들도 이런 정치적 맥락 속에서 고구려 핵심 인물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권을 위해 등용된 군부 세력과 평양선 기반의 귀족들이 그렇다고 완전히 척을 진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외교적으로 강경 노선이라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중국에선 고구려가 그토록 견제했던 단 하나의 통일된 왕조 수나라가 등장해 외교적으로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612년 수나라의 2대 황제 수양제가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로 쳐들어옵니다.
113만 명이라는 규모는 이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양제의 비효율적인 군대 운용 때문에 대규모 병력은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해 고구려에서 한 개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30만 명이 발동되는 을지문덕 장군에게 살수 대첩으로 제대로 털리죠 30만 명 중 2700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합니다.
무리한 대외 원정으로 수나라는 자멸해 버리고 그 빈자리를 당나라가 메우게 됩니다 고구려에선 영양왕이 죽고 그의 동생 영류왕이 즉위했는데 영유왕은 극단적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따라서 강경 외교론을 펼치는 군부 세력과 평양선 기반의 귀족들을 멀리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그동안 소외되었던 지방 귀족들을 대거 등용시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평양성 기반 귀족의 대표 가문이었던 연시 집 안에서 일을 내는데요.
연계 소문이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그 측근 귀족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고 꼭두각시왕 보정왕을 세운 채 본인이 대박리지로 군림하여 고구려의 전권을 휘두릅니다.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고구려 조정에선 외교 방침도 강경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당나라와 다시 전쟁을 치를 수 밖에 없었고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로 쳐들어옵니다.
당태종이 당나라 군대 사십오만은 만주 지역의 고구려 1차 방어선 대부분을 박살냅니다.
다만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발이 묶였고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당태종이 안시성 성주가 쏜 화살에 한쪽 눈을 맞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죠.
당태종은 사망하지만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손을 잡아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를 재침공하지만 이번에도 연개 소문이 직접 이끄는 기병대에게 된통 당해 돌아갑니다.
어떻게 해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체크 메이트 시키지 못하는 와중에 고구려에게 정말 뜬금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연개소문이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665년 연개소문의 새 아들 중 장남 연남생이 대막리지를 승계한 것으로 봐서 그쯤에 죽었나 봅니다.
그런데 연남생이 지방 순시 중 연계 소문의 둘째 아들 동생 연남 건의 반란을 일으켜 본인이 대막리지가 됩니다.
아마 연남생은 다시금 지방 귀족들을 서포트해 주려고 했는데 여기에 반발한 평양성 귀족들이 연남생을 내쫓은 것으로 보입니다.
별다른 선택이 없던 연남생은 적국인 당나라로 망명을 해버립니다.
신난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했고 연남 건은 수도 평양성에서 항전했지만 당나라의 거짓말의 속은 연개소문의 막내 아들 연남 산과 고구려의 국왕 보장왕이 성문을 열면서 수도는 함락되고668년 고구려는 멸망당합니다.
수도는 함락되었지만 지방에서는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은 나당 동명이 와해된 이후 신라가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고현무가 신라 서로유 장군과 연합해 오골성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며 황해도 재령에서는 건모자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건모점 진영에서 건모점과 건모점이 직을 시킨 임시구왕 안승 사이에 내분이 벌어집니다.
겉모점은 최대한 신라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아 했으나 안승은 본인의 입지를 위해 신라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했죠.
이러한 내부 갈등 속에서 안승이 겉모점을 살해했고 안승은 어떻게든 혼자서 부흥 운동을 지휘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고구려 부흥 운동 역시 673년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인 호로화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붙어 패배하면서 완전히 끝이 나버렸습니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이후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 거주하며 또 다른 문명과 국가들의 주인이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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