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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임꺽정 이야기

by 푸른바다99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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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을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부르죠.

이 중 가장 도덕의 이미지에 맞는 얼굴 하면 다들 우락부락한 임꺽정을 떠올리시죠 임꺽정은 대체 어떤 도적이었을까요. 


임꺽정과는 또 어떤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까요. 
임꺽정에 대한 실록의 첫 기록은 명종 재위 14년째이던 1559년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임꺽정의 활동기는 조선의 13대 왕이었던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고 보시면 되는데 명종 치세대가 조선이 건국되고 거의 2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조선의 정치 제도가 고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방 곳곳에는 탐관 우리들의 폭리에 백성들이 수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명종 재위 탐관오리들의 무한정 세금 탈취는 조선 역사 통틀어 세도 정책이 다음으로 두 번째로 심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명종 자체가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니까 조정의 지방 지배력은 약화되어 있었고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자기들 멋대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로비로 돈으로 해결 안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돈 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당하기 일쑤였고 백성들 구율기구는 제대로 운영조차 안됐으며 암행어사가 파견되어도 별 효과도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명종 위에는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민생이 파탄 날 대로 파탄 나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임 걱정 같은 도적들이 안 일어난더 이상한 사회 경제였습니다.


임꺽정이 언제 처음으로 도적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임꺽정은 백정 출신으로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니 신분적 차별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에 분노하여 도적대를 조직하고 도적의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임꺽정은 고향인 경기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무리를 이끌며 관할을 습격하고 투옥된 범죄자들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양반집을 습격하여 노비 매매 문서를 불태우고 자신과 자기 무리를 고별하는 사람이 있으면 협박을 하거나 만약 그게 양반집 자나 국가 관리일 경우 배를 갈라버렸다고도 합니다. 


임꺽정의 행보에 당시 조선 조정이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명종실록에 여실히 드러났는데요. 
읽어드리도록 이 도적들은 관군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빛이 없이 흉포가 극심하니 그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서 치안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당 관할 지역의 수령들이 이를 막지 못하고 그들이 출몰하는 대로 놓아두고 있으며 도적들들이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는 것을 보고도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직무를 유기하고 도리어 숨겨주어 억새가 그처럼 창궐하기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제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임꺽정을 잡아 출수해보겠다는 이어근이라는 자가 동네에서 싸움 좀 한다는 애들이 20여 명 정도 모아서 임꺽정을 공격하는데 화살 7대 먹고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혁근이라는 사람은 그래도 왕년의 도적들을 꽤 때려잡은 전적이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에게 덤비다가 그냥 골로 가버린 겁니다.


개성부도사에게 당장 임꺽정을 잡아드리라는 지시를 내려 개성부도사는 개성의 경계를 강화하고 임 걱정은 이 잡듯 샅샅이 뒤집니다. 


개성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가 껄끄러웠던 임꺽정은 아사이 서울 한양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임꺽정이 서울로 잠입했던 지라 정부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계속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시 명종 실록의 기사를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근래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공연하게 노략질을 하며 양민을 죽이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여도 주현에서 막지 못하고 병사도 잡지 못하니 그 형세가 점점 커져서 여러 곳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때로 일어나 빈 집에 진을 치고 밤이면 모였다가 새벽이면 흩어지고 칼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 

조선 정부와 한양시는 가용 인력을 총 투입하여 임꺽증의 행방을 찾았고 임꺽증이 있는 곳을 불시에 들이닥쳤습니다. 
습니다. 임꺽정은 무사히 도망갔지만 그의 부하들이 잡혀버린 겁니다. 


우리 임꺽정은 흰 수염처럼 관거로 쳐들어가서 건물을 부수고 부하들을 데리고 나왔다죠

그런데 우리가 헷갈려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임꺽정은 소설 홍길동의 모습처럼 부잣집을 털어 그 재산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의적이 아닙니다. 
그냥 임꺽정은 단순한 도적이었습니다. 

 

의적으로서의 모습은 매체와 소설에서 창작된 경우고 실제 임꺽정은 무지막지한 도적이었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임꺽정을 의적으로 착각할까요. 
백성들이 임꺽정에게 호응한 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명종 때에는 도적대들이 창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되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봤자 이 돈 전부 세금으로 가게 되고 세금이 곧 빚이 되어 버리는 마당에 굶어 죽을 바에 한 도적대에 입단하는 백성들의 수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소심한 백성들은 굶어 죽거나 세금 내지 못해서 권장 맞아 죽거나 관아에 붙잡히면 그 사이 돌봐줄 사람이 없는 늙은 부모님 여기 이 어린 자식들 배고프다고 우는데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궁지에 몰린 백성들이 살 남은 방법이라고는 차라리 노비로 전락해서 부잣집 양반에게 거두어지거나 도전이 되거나 했습니다. 
거기에 자기들 못살게 굴던 탐과 우리들을 임꺽정이 처단해주는데 속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도적이 되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임꺽정의 무리는 물론 다른 도적재들을 숨겨주기 일쑤였던 거죠. 
이때 임꺽정의 이름이 퍼지니 전국적으로 도적재들이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전부 임곽증에 부하들이었다는 게 아니라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조선 관군조차 어쩌지 못하는 도적대들이 있다더라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냐 이러면서 전국 곳곳에서 도적대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조선 정부도 나름 머리를 쓰긴 했습니다. 
만약 임꺽정 무리들을 고하는 사람에게 그 집의 45년 세금을 경감시켜준다거나 노비의 경우 면천시켜준다거나 혹은 도적들 일부를 설득시켜서 자수하게 하면 무조건 죄를 용서해 주겠다든지 이런 회유책을 많이 쓰기도 했습니다. 
임꺽증인 거치를 자주 옮긴 거는 조선 정부의 이런 회유책이 나름 잘 먹히기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관군과 관리들에게는 임꺽정 무리를 토벌하거나 잡아오면 무조건 정상품 이상 벼설로 올려주겠다는 일종의 현상금 아닌 현상금도 내걸었죠.

이러니까 공에 눈이 먼 관리들이 거짓말을 치기도 합니다. 
확인도 순경사 이사증이 이 임꺽정을 체포했다고 조정에 보냈는데 알고 보니 임꺽정이 형 도사치였습니다.

의주 목사는 아무 백성 한 명
붙잡아다가 강제로 돈을 주고 협박하며 임꺽정 연기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금방 들통납니다. 도저히 임꺽정이 붙잡히지 않으니 명종은 임꺽정의 도적떼들을 평범한 도적대가 아닌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반란 진압 군대를 따로 조직합니다. 
이래서 임꺽정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외부 소탕 경험도 꽤 있던 남치근을 반란 진압 국군총사령관으로 삼고 몇 개 도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수색하게 했습니다.

문제는 남측은의 수색 과정이 또 너무 지나쳤습니다.

물증도 없이 의심
가면 죄 없는 백성들을 다르다 고
고문시키고 남치근의 악행은 소문으로 퍼졌고 조정과 명종은 남치근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키려고 하던 찰나 황해도 구월산이라는 곳에 임꺽정의 본거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남치근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켜 구월산을 포위했습니다. 
임꺽정과 무리들은 끝까지 구월산에서 조선 관군과 싸웠으나 다 죽거나 혹은 항복해 버리면서 임꺽정의 도적단은 해산되어 버렸습니다. 
임꺽정은 관군으로 변장하여 도망치려다가 배신한 부하에게 들키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죠. 


체포될 때도 임꺽정은 맨손으로 무장한 관군 몇 명을 혼자서 때려 잡기도 했답니다. 
명종 17년이던 1562년 바이오로 임국정은 체포가 되면서 34년에 걸쳐 조선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과 그 도적단의 활보도 끝이 났습니다. 
임꺽정이 어떻게 처형됐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했던 도적대였고 명종의 반란 군으로 규정했을 정도이니 꽤 잔인하게 촬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거는 임꺽정 체포
후사관이
실록에다가 쓴 임걱정 사건 관련 그의 논평입니다. 
당연히 백정 출신 도적에 대해서 욕으로 도배되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다시 한 번 이 실록에다가 쓴 사관의 논평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렴의 가렴주구 하시며 수령의 가렴 증후는 중앙정부
청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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