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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의 유래

by 푸른바다99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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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의 남녀가 함께 외딴 섬에 고립되어 죽을 때까지 발견되지 못한다고 칩시다 조난자들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이 또 자손을 낳고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사실 현실 속에 자연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결말은 아주 끔찍하고도 비참하다고 알려져 있죠 1722년 부활절 일요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야코 로헤베인이 이끄는 탐험대가 광대한 태평양 한복판에서 우연히 한 섬을 발견합니다. 


이 섬은 가장 가까운 피케언제도로부터 더 쳐도 2천75km 섬이 아닌 육지로부터는 3700km 떨어진 지구에서 가장 고립된 곳 누군가 우연히 발견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운 곳이었죠. 


야코프 로에베이는 이 섬을 발견한 날을 기념하여 섬의 부활절의 섬 그러니까 이스터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미스테리했던 점은 도처에 널린 거대한 석상들 바로 모아이들이었죠. 


왜냐하면 섬에는 그런 거대한 석상을 만들고 옮길 만한 재료 같은 것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거든요.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에 가까운 이 섬에서 어떻게 이런 거대한 석상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걸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원주민들은 이걸 왜 만들었을까요. 로헤베인의 발견 이후 수세기 동안 많은 가설이 등장했습니다. 
잉카인들이 건너와 석상을 조각하고 떠났다는 그럴싸한 이야기부터 외계인들이 와서 떨어뜨리고 갔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말이죠. 
그리고 20세기가 되어 면밀히 조사된 이스터 섬의 역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터 섬의 원래 이름은 라파 누이 사람이 살기 전에 라파누이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숲이 울창한 푸르른 섬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 900년경 인류 역사상 최고의 항해 고인물이었던 폴리네시아인들이 이 섬을 발견하고 살기 시작했죠. 
라파누이 사람들은 두 개의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귀가 긴 장이족 귀가 짧은 단이족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장이족과 단이족의 추장들은 서로의 권력과 명예를 과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거대한 석상인 모아이를 세우기 시작했죠. 
채석장에서 바위 위를 캐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아이를 섬의 곳곳으로 옮기기 위해 나무가 필요했습니다. 
라파 누이의 울창한 숲에는 목재가 넘쳐났고 장이족과 단이족은 마음껏 나무를 베어다 모아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고
더 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아이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많아졌죠. 인구가 많아질수록 무아이도 더 빨리 만들어졌습니다. 
목재는 끊임없이 필요했고 고립된 섬이었던 라파누이의 숲은 점점 사라져 갔죠. 
인구는 많아지고 자원은 고갈되어 갔습니다. 
소양이 점점 침식되어 농사가 힘들어지고 고기잡이에 쓸 배도 만들어질 수 없어진 건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섬에 있던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고 더 이상 모아이를 만들 수 없어진 장이족과 단이족은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기로 했죠. 
1680년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장이족들 전멸당했습니다. 살아남은 단이족들은 모아이를 쓰러뜨리고 파괴했죠. 
농업 생산량이 극히 저하된 고기잡이도 할 수 없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폐화된 섬에서 생존자들은 기어이 서로를 잡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인육을 공급하기 위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고 섬은 완전히 쇠락해 버렸죠. 
1만 5천 명에 달하던 섬의 인구는 겨우 2천 명 남짓으로 급감했습니다.

서로의 끊임없는 욕심과 접대감 악귀로 인해 자멸해버린 황폐한 섬은 그렇게 1722년 부활절 네덜란드 탐험대에 의해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라파누이 그러니까 이스터 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고립된 환경 탈출 수단의 부재 유한한 자원 넘쳐나는 인구 어쩌면 우리 지구 자체도 우주 속의 이스터 섬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구 섬과 지구인들은 공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이기적인가 오늘날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천성적으로 악하다고 이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회와 기술 종교 등 문명이라는 이름의 껍데기가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감싸고 있다고 그리고 이런 껍데기는 작은 충격에도 균열이 생겨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네덜란드의 동물학자 프랑스 드 발은 이런 아이디어를 껍데기 이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사실 아주 고대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져 인간 종 전체가 스스로를 악하다고 믿게 만들어 왔죠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사악한 신 킨구의 피를 진흙과 섞어 만든 것이 바로 인간들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았다고 이야기하죠. 
불교에서는 어보와 환생에 묶여 있는 인간이 해탈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이 문명의 껍데기가 부서지며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 예컨대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규모 학살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들은 껍데기 이론에 더욱 매달렸습니다. 
아우슈비츠와 블라크로 대표되는 강제 수용소와 인종 청소를 다른 이론으로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각국의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은 근대적인 방식으로 작은 이스터섬을 재현해 체계화된 실험 결과를 축적 그 중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가장 유명한 실험이죠.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197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평범한 학생 24명을 모집하여 반으로 나누고 각각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을 맡긴 후 2주 동안 관찰하는 실험이었는데요. 
실험의 목적은 감옥에서 일어나는 심리 상태들에 대해 연구하기 위한 비교적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실험은 최대한 실제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죄수 역할을 하는 학생들이 집에서 체포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평범한 학생들은 고립되고 분열된 상황에 처하자 급격히 돌변했습니다. 
실험 1일 차에 교도관들은 교도소 내의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17가지의 통제 규칙을 만들었고 2일차에는 수감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소화기로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3일 차 수감자들이 이미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자신들을 진짜 죄수라고 여기기 시작했으며 4일 차에는 현실과 실험을 구분할 수 있는 인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일 차에는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을 고문하는 것이 관찰되기에 이르렀죠 예상치 못한 끔찍한 상황에 실험은 5일 만에 종료되었지만 이 실험은 전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충격적으로 흘러간 실험 결과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통념을 강화시켰죠.

교도관들이 벌인 행동은 단지 조금 뒤틀린 상황에 놓인 것만으로 문명의 껍데기가 쉽게 무너져 내린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 외에도 인간 본성의 악함을 증명하는 수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정말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고 문명은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구속하는 위태위태한 껍데기일까요. 
인간 내면의 악한 본성에 대한 믿음은 이쯤 되면 반박할 수 없는 진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냉소적인 믿음에 반박하려는 소수의 학자들도 존재해 왔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 휴먼 카인드의 저자 위트브레흐마는 그런 학자들 중 가장 핫한 인물이죠. 
이스터 섬의 인구가 애초에 1만 5천 명까지 늘어난 적이 없다면 섬 주민들 간의 사육이 증거가 없는 그저 무서운 전설일 뿐이었다면 섬의 나무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경작지가 늘어났다면 그리고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서 설계자들이 교도관들의 행동에 개입하고

부추였다면 정작 실험 참가자들은 그런 지시 사항에 저항했다면 브레흐만은 인간 본성의 악한 면을 뒷받침하는 유명한 근거들을 찾아다니며 최신 연구 성과를 통해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습니다. 
자 저자의 세심한 자료 수집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섬의 원주민들은 피에 굶주린 식인종이 아니었습니다.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죠.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 참가자들은 어떨까요. 
평범한 학생들은 제복 하나 입었다고 나치 당원들처럼 흑화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럽게 진행되는 실험에 저항하고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어쩌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만 엄선된 자기 비하적인 암시를 주입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이집트 신 토트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문자의 발명은 인간의 영혼에 망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인간들은 문자에 의존해 스스로 기억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똑똑한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쩌면 현대인에게도 의미심장하죠.

텔레비전과 뉴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 속에서 연일 끔찍한 살인 사건이나 제3 세계의 끊이지 않는 분쟁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 전체를 보면 뉴스에서 엄선한 이런 사건들은 실제로는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일 뿐이죠. 
아마 이런 뉴스를 보도한다면 아무도 보지 않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장에 와 있습니다. 
이곳은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일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봅시다

문자의 발명 아니 문명의 발전이 우리를 탈락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브레흐만은 노시보 효과에 주목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긍정적 결과를 이끌어내는 플라시보 효과와는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결과 이끌어내는 효과를 말하죠. 
문명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억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고결한 인간 본성을 잊고 악을 재생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아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브레크만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자연 상태의 인간이 더 행복했다고 단정 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적어도 묵시고 효과에서 빠져나와 양쪽 면을 골고루 들여다볼 때가 됐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죠

성악설 성선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믿으시나요. 
사실 저희 지식 해적단도 빼박 성악설 파였는데요. 
휴먼 카인들을 읽고 나서 어쩌면 그동안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깊게 고찰을 해보게 됐습니다. 
책에서는 앞서 다룬 이스터 섬과 스탠포드 감옥 실험 외에도 2차 대전의 런던 대공습이나 미국 남북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례를 다루며 인간 본성의 선한 면에 대해 어떻게 보면 낙관적인

어떻게 보면 희망찬 근거를 제시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 시점에 이른 현재 한 번쯤은 노시보 효과에 대해 경계하고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 선한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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