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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 일제 강점기를 맞이한 이유

by 푸른바다99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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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 일제 강점기를 맞이한 이유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계속되던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국민들은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펼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31운동이라고 하며 3월 1일을 31절이라고 부르죠.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였죠. 
일본이 왜 우리나라를 침략했는지 우리나라는 왜 식민지가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아시아는 동쪽에 있는 아시아 나라를 말하며 대표적으로는 한국 중국 일본이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중국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의 이름도 중국이 아니라 청나라였죠. 
청나라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본인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양에서는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서양 국가들은 비교적 덜 발달된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렸고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길 원했습니다. 
영국과 청나라 역시 무역을 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영국의 차를 영국은 청나라에 모직물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자급자족을 많이 했고 자기네들이 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국의 모직을 많이 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돈이 필요했고 청나라에 아편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아편은 양귀비에서 채취하는 마약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어 청나라 국민들은 아편에 빠르게 중독됐습니다.

청나라는 아편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마약상들을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계속 돈이 필요했고 결국 강제로 무역을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며 1840년에 일어난 영국과 청나라의 싸움이었죠. 
강한 줄만 알았던 청나라는 아편 전쟁에서 완패했으며 결국 영국의 의도대로 무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청나라 내부에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습니다.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운동을 양무 운동이라고 부르죠. 
이때 일본에서도 근대화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운동은 메이지 유신이라고 부르며 1868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던 양모 운동에 비해 메이지 유신은 성공적이었으며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근대화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이었죠. 
187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던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별기군이라고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것은 일본인 교관이 지도하는 일본식 군대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별기군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지만 조선식 9군대에게는 월급을 13개월 동안이나 주지 않는 부당 대우를 했었습니다.

심지어 밀린 월급을 쌀로 지급했는데 그마저도 불량 쌀을 지급해 결국 1882년 90군데는 군란을 일으켰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하자는 개화파 인물들과 민 씨 일가 그리고 별기군을 습격했습니다. 
이 사건을 이모군란이라고 하며 민 씨 일가는 명성황후 쪽 사람들을 말하며 이 당시 조선의 왕은 고종이었습니다.

일이 점점 커지자 고종은 청나라에 군대 파병 요청을 했고 청나라의 군대에 의해 이모군란은 끝나게 됩니다. 
일본은 별기군이 습격받으면서 공사관을 비롯한 자국민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면서 조선에게 보상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맺어진 조약이 제물포조약이며 이것으로 일본의 경비병이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으며 과거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 무역을 시작했죠. 
하지만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것을 보고 청나라의 시대는 갔기 때문에 청나라를 몰아내야 한다는 세력이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때마침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됐고 청나라 군대 일부가 조선에서 철수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188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하죠. 
갑신정변은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이 도와주기로 했지만 배신했기 때문이죠.

갑신정변은 단 3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3일 천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청나라의 간섭은 더 심해졌고 일본은 이모군란 때처럼 비슷한 핑계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었으며 지금 당장은 청나라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지만 만약 한쪽의 군대가 들어오게 된다면 다른 쪽의 군대도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이었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대혼란 상태였습니다. 
양반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갈수록 늘어났죠 당시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로 식량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식량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관리들은 더 많은 식량을 가져왔고 결국 농민들은 폭발했습니다.

이들은 죽창으로 무장해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189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합니다. 
이에 고종은 수습을 위해 또다시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합니다. 
텐진 조약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면 일본의 군대도 들어온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종은

감히 청나라 군대가 오는데 일본 군대가 온다고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종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에 들어왔고 고종의 예상과 달리 그 다음 날 일본의 군대도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곧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조선 정부와 빠르게 합의했습니다.

사건이 끝나면 텐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 모두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청나라는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알아본 결과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고 말했죠. 
일본은 청나라에게 함께 조선을 개혁할 것을 제안했지만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죠 1894년에 열린 이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도중에 일본은 조선을 변화시킵니다. 
청나라의 영향력을 완전히 받지 않는 나라로 말이죠.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이것을 가보 개혁이라고 하죠.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양무 운동으로 근대화를 진행 중이었던 청나라는 계속된 패배로 근대화에 실패했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를 탈탈 털어냈습니다. 
이때 맺은 조약이 시모노 새끼 조약이죠. 
그 결과 일본은 요동반도까지 진출하게 되고 이때부터 러시아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목표는 만주까지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이 계획을 알아챈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게 요동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양 강대국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준 일본 이것을 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합니다. 
조선 정부는 친러 세력으로 점점 바뀌고 있었고 불안함을 느낀 일본은 결국 명성황후를 살해합니다. 
189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하죠.

을미사변 이후 친일 세력의 힘이 점점 커졌고 자신도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이것은 1896년에 일어났으며 아관파천이라고 하며 1897년까지 1년 동안 고종이 경복궁을 나와 있었던 사건입니다. 
러시아 덕분에 친일 세력을 몰아냈지만 이제 조선은 친러 세력이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아직 러시아와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줬고 고종은 다시 궁으로 돌아와 왕권을 회복시키고 1897년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바꿨습니다. 
러시아는 만주와 대한제국 쪽으로 세력을 넓혀왔고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는데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더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이것을 영일동맹이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원했고 일본도 대한제국을 원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한 것이죠.
러시아는 땅이 넓기 때문에 군인들이 전장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앞섰습니다. 
군인들과 물자가 제때 도착한다면 말이죠.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904년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됐으며 이것을 러일 전쟁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는 완성되지 않았죠.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세계 여러 나라들의 예상과는 달리 많은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이겼던 청일전쟁에 비해 러일 전쟁은 일본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자신들의 히든카드인 발트 함대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했지만 당시 일본의 함대도 굉장히 강했고 준비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대패했고 결국 러일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많은 돈을 뜯어내길 원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국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죠.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으니 러시아에게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내부 사정 때문에 전쟁을 잠시 멈춘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근대화가 일어나는 도중이었는데 노동자들의 비폭력 시위가 많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러시아 정부에서 노동자들을 사살했던 이른바 피해 15일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러시아는 전쟁에서 졌지만 졌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에게 보상을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도 계속 전쟁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중재 아래 러시아와 조약을 맺습니다. 
조약 내용 중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때 맺어진 조약을 포츠머스 조약이라고 하며 1905년의 일입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미국과 러시아가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허락해 준 셈이죠. 
어쨌든 일본은 국력을 다시 회복해야 했습니다. 
돈이 필요했고 자원이 필요했고 노동자가 필요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데 더 이상 뭐라고 할 나라는 없었습니다.

다른 유럽의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고 대한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은 조약을 맺었고 이것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됐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파견된 일본 대사관들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재순 권중현의 찬성을 받아냈는데

이것이 바로 을사늑약이라고 불리는 을사조약입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 다섯명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은 힘을 키우기 위해 대륙 진출을 꿈꿨고 근대화 이후 만주를 지배하길 원했습니다. 
어쩌면 동아시아 전체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주와 청나라로 가는 길에 있는 조선은 주요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배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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