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화역구라고 불리는 발칸반도 유럽의 남동부에 위치한 이 지역에는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치고비나 그리고 코소보까지 다양한 국가들이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위치 특성상 역사적으로 강대국 간의 전쟁에 수없이 시달려 왔고 오늘날에는 영토 분쟁으로 인해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분쟁이 심각한 이 7개 국가는 불과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국가가 바로 많은 분들께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이름 유고슬라비아입니다.
과거 상당한 지역 강국으로서 군림했던 이 국가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연방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또 어떠한 이유로 결국 7개의 국가로 갈갈이 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이번 영상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탄생과 분열 과정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뜻 그대로 풀이하면 남 슬라브인들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가 처음. 국가의 형태로 탄생한 것은 1918년 1차 대전 직후였습니다.
1차 대전 시기 독일과 오황제국의 침공을 받은 남슬라브인들은 타국으로 망명을 떠나 후유를 도모하였고 이 시기 남슬라브 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들은 남슬라브 족만의 통합 국가 건설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쟁 기간 동안 남슬라브 국가 건설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들은 전쟁 이후 통합 국가 건설을 실현하게 됩니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연합 왕국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이 왕국이 1929년에 변경한 국명이 바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고 왕국은 지도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와 모두 접해 있던 이 위치로 인해 향후 거대한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추축국의 침공에 직면하여 점령되어 분할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점령 이후에도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저항군을 구성하여 게릴라전을 이어나갔고 이때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낸 세력이 드라자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당파 세력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추축국과 싸우는 동시에 유고슬라비아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그들 간의 내전도 함께 벌였고 결국 내전 끝에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이 추축국을 몰아내고 왕당파까지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1945년 11월 29일 티토의 주도 하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공식적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요구 슬라비아를 이끌기 시작한 티토는 전후 초기에는 같은 공산 세력인 소련과 동맹을 맺고 스탈린식 소비에트 경제 발전 모델을 채택하는 등 소련 측과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고 독립을 쟁취했던 티토는 스탈린이 마치 자국을 위성국마냥 치부하는 데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곳 슬라비아와 소련은 이곳 알바니아를 둘러싼 권력 다툼을 빚으며 빠르게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1948년 티토와 스탈린 간의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논쟁 끝에 티토는 소련 주도의 동국권과는 별개의 독자 노선을 타기로 결정하였고
이렇게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적인 살림을 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동구권 블록에서 이탈하며 정치 경제 위기에 직면한 티토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미국 등 서방과의 접촉을 이어나갑니다.
이러한 공산진영의 분열에 미국은 환영의 메시지를 던지며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 경제적 지원을 퍼붓기 시작했고 유고슬라비아는 냉전기의 진영 간 대립 상황을 이용하여 서방의 지원까지 받으며 성공적으로 중립 노선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티토 정부는 미소 냉전기의 양극 체제에서 벗어난 제3의 길을 꾸려나가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그렇게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는 인도 이집트 등과 함께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대표 국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티토는 기업 경영의 주체를 노동자들이 되도록 하는 노동 자주 관리 제도 도입과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 경제를 접목시키는 시장 사회주의 체제 그리고 배후 미국의 지원으로 유고슬라비아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주도하였고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다르게 서방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내며 사회주의 국가 중 가장 서방 친화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공산권 국가답게 히토 중심의 독재 정치와 이에 대항하는 정치적 운동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뒤따르긴 했지만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 비해서는 상당한 자유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편이었고 제3세계의 대표 국가 중 하나로서 외교적 영향력도 높을 뿐만 아니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에 달하며 외부에서 보기에 상당히 번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전 모습과 다르게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뿌리 깊은 갈등들이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1945년 건국 이후 국가는 줄곧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6개의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각 공화국들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자율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상당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세르비아인 외에 다른 민족들은
세르비아인이 유고슬로비아를 주도하는 상황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시장사회주의 노동자 자주 권리 제도 같은 다소 자유로운 경제 시스템으로 인해 각 공화국 지방정부의 자율성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으며 서방과 교류가 활발한 북부와 그렇지 못한 남북 간의 경제 격차도 빠르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중앙 정부는 연방 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북부에서 확보한 자금 상당수를 남부의 발전에 투입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보유한 북부 지역 공화국들은 가난한 남부에 대한 지원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느꼈으며 남부의 공화국들은 북부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국가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결국 60년대 무렵부터 각 지역에서 자신들의 자율성과 이익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당국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1968년 알바니아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코소보를 세르비아 공화국 내에 자체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또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은 정부가 지나치게 세르비아에게 양보를 강요한다고 불만을 품게 되었고 다른 민족들은 당국의 양보를 바라보며 강한 자극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년의 사건들을 거치며 1971년 크로아티아에서 무려 연방 탈퇴와 유엔 가입을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위기를 느낀 티토는 이러한 민족주의 세력들을 군대와 경찰을 통한 대규모 진압에 나서며 시위를 찍어 눌렀으나 이미 한 번 붙어버린 민족주의의 불씨는 쉽사리 꺼질 리 만무했습니다.
결국 키토는 1974년 헌법 개정과 1976년 법 보안을 통해 각 공화국에게 상당히 높은 자율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신원법에 따르면 중앙정부는 국방 외교 그리고 거시경제에만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각 공화국에 맡기는 방식으로서 사실상 기존 연방 형태보다 더욱 느슨한 공화국 간 연합의 형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또한 코소보 등 자치주에서도 공화국과 동등한 수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게 되어 사실상 공화국에 준하는 자율성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원법으로도 쉽게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70년대부터 본격화된 경제적인 불황이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가 자랑하던 노동자 자주 관리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나치도록 보호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기업의 수익은 대부분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으로 돌아가버려 미래 투자와 기술 개발 투자의 저하를 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발생한 올 쇼크는 중앙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의 대실패를 이끌어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경제 위기 지역 간 격차 그리고 민족주의 대두로 유고슬로비아 연방의 단결성은 70년대 동안 급격히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심화되는 공화국 간의 분열이 그나마 조율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정치적 위상과 카리스마를 지녔던 틱토의 존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존재 덕분에 간신히 연방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라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1980년 5월
히토가 사망합니다. 그의 사망 직후 연방은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던 코소보를 필두로 연방 탈퇴를 주장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로 인해 코소보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집단 린치가 벌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동안 다른 민족에 대한 자율성 부여로 지속적으로 양보를 강요받았던 세르비아인들은 히토가 다른 민족의 자율성만 챙기느라 오히려 세르비아인들의 권리는 모조리 무시하고 북부 공화국의 이익만 대변해 왔다라고 주장하며 본격적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폭발한 세르비아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이는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자치권 박탈 조치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이 대규모 저항을 벌여 유열 사태가 발생하자 밀로셰비치는 이를 계기로 코소보 내 모든 공공기관을 폐지하고 언론까지 장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사태 이후 다른 공화국들은 세르비아 행보를 비난하며 대규모 연방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더불어 동유럽 공산권 붕괴까지 벌어지며 이고 슬로비아의 해체 여론에 기름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밀로셰비츠는 자신이 장악한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 세력을 이용해 유고슬로비아 연방을 세르비아 중심의 중앙집권 정치 체제로 바꾸기를 시도했고 다른 공화국들은 세르비아의 독단적 행위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한편 전체적으로 공산당의 권력이 약화된 공화국 사이에서는 공산당 단일 정당이 아닌 복수정당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고 이렇게 공산당이 밀려나고 민족주의 정당이 대거 권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티아가 나란히 독립을 선언하며 연방 분열의 시작을 알립니다.
세르비아는 이러한 반역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연방군을 이끌고 들어갔고 이것이 바로 유고슬로비아 내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연방군에는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들이 대거 구성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군 내에서도 막대한 반발과 이탈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코아카 공화국의 시민들 대다수가 독립을 지지하며 시민군을 구성하여 세르비아의 침공을 악작같이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 중 슬로베니아는 코라티와는 달리 구성원 대부분이 슬로베니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세르비아와 지형적 역사적 이해관계 상충이 적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얼마 안 가 세르비아는 결국 슬로베니아로 끌고 들어간 군대를 철수하며 독립을 인정해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에는 세르비아인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영토까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전의 장기화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크로아티아는 4년간의 싸움 끝에 1995년이 되어서야 세르비아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마케도니아는 타 공화국들의 난장판 속에서 별다른 유혈 사태 없이 독립에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중간에 낀 보스니아는 참혹한 민족 학살이 난무하는 내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보스니아는 이렇게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티토가 살아 있을 시절에는 이러한 다민족 지역이 유고슬로비아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으로 여겨졌었으나 민족 간 갈등이 확산되던 시점에 보스니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뒤엉켜 살아간다는 특성은 영토를 명확히 분할하기도 힘든 인구 분포 때문에 수년간의 참혹한 내전과 학살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전쟁의 종식을 위해 eu 미국 나토 유엔이 직접 개입하여 내전을 찍어 눌렀고
전쟁 당사자인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를 협상 테이블에 앉혀 1995년 평화협정을 맺도록 하였습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분쟁 지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단일 국가 하에서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합한 보스니아 헤르치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가 중심이 되는 스르스프카 공화국 두 체제가 병존하는 1국가 2체제로서 합의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별도로 유고슬로비아 연방공화국을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들은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국명을 변경했다가 2006년 서로 개별 국가로 해체를 맞이합니다.
1998년엔 유고슬로비아와 코소보 간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이후 나토와 유엔이 개입하여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이후 서방의 주도 하에 코소보의 자치가 주어졌고 2008년엔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코소보는 독립 지지와 반대가 아직까지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20세기 초부터 장기간 이어져 왔던 유고슬로비아는 오랜 기간 쌓여온 갈등 끝에 결국 여러 국가로 찢어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90년대 내전 당시 불안정하게 맺어진 평화는 현재까지도 갈등의 불씨를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칸반도는 오늘날까지 유럽의 화약고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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