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대양의 시대가 펼쳐진 16세기 유럽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북아메리카에 상륙하여 이곳이 프랑스 왕국의 대륙임을 공표하기 위해 십자가를 꽂아버립니다.
이렇게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누엘 프랑스가 탄생하면서 오늘날 캐나다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는 전쟁 통에 머나먼 대륙이 이야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이렇게 북아메리카는 몇몇 이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있는 둥 마는 둥 간신히 그 영향력을 유지해 갔습니다.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1608년 프랑스의 탐험가 사위 엘트 샹플랭은 이곳 세인트 로렌스 강 부근 케이프 다이아몬드에 본격적으로 프랑스인들의 정착촌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현 캐나다의 퀘백입니다.
이후 퀘백은 뇌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고 본격적인 정착을 이룬 프랑스인들은 수십 년 동안 원주민들과 모피 무역을 이어가며 살아갔으며 원주민들 중 호전적인 부족이었던 이로코의 조건은 전쟁까지 감행하며 처절하게 식민지를 발전시켜 갔습니다.
근데 과연 누가 악당인 걸까요.
1700년대를 넘어서며 누 프랑스의 인구는 한 세기 만에 수백 명에서 약 6만 명까지 증가했으며 그동안의 거친 전투들은 프랑스 이주민들을 야생의 전사들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러나 늘 프랑스를 통치하던 루이 14세와 식민지의 총독은 이주민들에게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의 끊임없는 팽창을 요구했고 결국 이는 이로코에조뿐만 아니라 남쪽의 영국 영 13개 식민지역과의 분쟁을 야기시키고 말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북아메리카에서 상대방에게 재빠른 습격 방화 학살을 자행하며 적대감을 쌓아갔고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결국 유럽 제국들에 흥겨루기에 이용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2 13기의 영국령 식민지는 훗날 영국에서 벗어나 미국이라는 귀여운 국가로 독립하게 됩니다.
아무튼 10년간 지속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던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들은 175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투에서 당시 영국 식민지 장교였던 조지 워싱턴과 브래독 총사령관을 오하이오 계곡이라는 구석탱이로 몰아내기까지 하며 이와 같은 승전보에 기세등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의 작은 승리들은 결국 더욱 거대한 위기의 바람들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는데 영국은 식민지에서의 패배와 슈트의 이를 갈며 리벤지 매치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본토의 대규모 정식 함대와 정예 병력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을 야기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이 이렇게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7년 전쟁의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식민지 방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는 결국 영국의 북아메리카 장악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대규모 왕실 함대는 프랑스의 조촐한 함대를 너무나 쉽게 격파해 버렸고 심지어 프랑스는 본토에서 온 장군과 북아메리카 출신 총독들 간의 내부 분열까지 벌어지며 지상전에서도 정상적인 전투력을 도저히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1760년 9월 영국은 프랑스군을 격퇴시키고 이만큼의 식민지를 장악하는 대성과를 이룩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군대와 대부분의 상인 지도자들이 본국으로 귀환했고 남아 있던 프랑스계 식민지인들은 영국용 북아메리카에서 영어를 사용하고 영국인처럼 살아갈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당시 패배한 프랑스 사람들은 고작 눈 덮인 얼마 되지도 않은 서른따위 포기해도 상관없어 라며 말도 안 되는 위로를 이어나갔고 이렇게 영국형 식민지로서 캐나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를 넘겨받은 영국은 이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지난 7년 전쟁의 재정을 탈탈 털어넣었던 영국 당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도를 넘어선 세금 정책과 간섭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13개 적들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결속된 식민지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미국 독립전쟁을 이어나가기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영국의 억압적인 지배에 시달리는 프랑스계 주민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목적으로 영국용 쾌백에 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도 영국은 미국인들의 저글링과 같은 러시를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미국의 혁명은 영국 당국의 위기감을 안겨다 주었고 이는 결국 쾌백에서의 정책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791년 영국은 우선적으로 기존 퀘백주를 둘로 분리하였습니다.
서쪽에는 어퍼 캐나다 지역을 새로 적립하여 프랑스계 주민과 미국인들에게 영국계 주민들의 모범적인 사회를 선보이고자 하였고 동쪽은 로어 캐나다로 지정하여 영국식 의회제도를 이식하면서도 프랑스계 주민들에게 그들의 언어 시민법 종교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아주 아주 널널한 정책을 펼치기
했습니다. 이 같은 영국의 통치는 생각 이상으로 식민지인들의 높은 정치적 만족도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고 1760년에 6만 명이었던 인구는 1810년대에 이르러 어느새 33만 명이라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게 보였던 영국 당국은 실제로는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차별대우하고 있었고 로워 캐나다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던 프랑스계 주민들의 정체성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한편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과 영국 캐나다 사이에서는 국경 상업 등의 이유로 지속적인 갈등이 있어 왔는데 이 같은 갈등은 결국 1812년 6월 미영 전쟁으로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1812년부터 1815년까지 이어지며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나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아무런 조건과 소득도 없이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자는 조약으로 끝을 맺습니다.
전쟁 이후 영국 캐나다에서는 이제 수많은 이민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영국 본토에서 먹고 살 길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잔뜩 몰려오면서 점점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식민지였던 캐나다의 주민들은 영국 본토에 비해 정치적 참여도 제한되어 있었고 남쪽에 자유롭고 광대한 신생 국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부유해져만 갔으며 캐나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이주민들의 고열을 쉴 새 없이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로워케나바의 경우 프랑스계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영국계 지주와 관리들의 부패는 그들의 적개심을 계속해서 지켜 오르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1837년 갈등과 의심 그리고 적개심의 끝없는 누적은 결국 루어 캐나다에서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계 반란군과 영국 정규군은 엎치락 뒤치락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고 반란은 결국 정식적인 훈련을 받았던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로어 캐나다가 반란을 일으켰던 1837년 같은 해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어퍼 캐나다에서도 똑같이 반란이 일어납니다.
애초부터 버퍼 캐나다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은 영국 본토에서 밀려오는 이민자들에 의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남쪽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미국은 이들의 현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던 것입니다.
결국 어퍼 캐나다에서도 로워 캐나다와 비슷한 시기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의 반란은 안타깝게도 단 며칠 만에 민병대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벌어졌던 양 캐나다에서의 반란은 식민지 수뇌부의 정책에 막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정부는 앞으로 이 같은 소요가 또다시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로퍼 캐나다와 로워 캐나다를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결국 두 개로 나눠져 있던 지역은 1840년 연합법 채택 이후 하나의 캐나다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통합된 캐나다 주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오는 영국 아일랜드의 이민자들로 넘쳐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등장한 노동 집단은 문화를 파고 철도를 짓고 광산을 건설하고 도시를 발전시키며 캐나다의 경제적 번영을 이뤄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전쟁까지 치러낼 정도로 앙숙이었던 캐나다와 미국은 상호 간의 무역과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관계를 개선해 나갔고
1854년에는 관세 철폐를 통해 양자 간 경제 호황을 이끌어 내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1861년 벌어진 미국 내 남북전쟁은 캐나다에게 있어서 나무 식량 같은 전쟁 물자를 팔아먹기 위한 아주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 덮인 설원 지역이 경제 성장을 하는 만큼 광활한 초원을 차지한 미국은 캐나다의 2배 3배 이상의 성장 속도를 보여주며 빠르게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1865년 내전을 종결시킨 미국은 전쟁 과정에 개발한 신무기와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전쟁 동안 스스로 파괴한 기반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산업적으로 대호황을 맞이하여 세계 열강 반열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북쪽의 영국령 식민지와 영국 당국은 전쟁 전후로 나날이 강해지는 미국이 이제 북아메리카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나머지 식민지역들의 통합을 하루빨리 이루어내야만 했습니다.
프랑스계와 영국계 시민들 간의 갈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 이들은 모두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67년 7월 1일 영국 당국은 세계로 분열되어 있던 캐나다 주와 뉴브런 주의 그리고 노바스코샤를 통합시켜 캐나다 자치령이라는 사실상의 국가를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캐나다의 건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비해서 너무나도 평화롭게 이루어진 결과물이었습니다.
1880년까지 캐나다는 주변 지역을 점차적으로 자국으로 편입시키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고
이렇게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후 캐나다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점점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1931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표와 함께 캐나다를 포함한 영국의 연방 국가들은 독자적이고 서로 평등한 지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캐나다가 국제 무대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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