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먼 옛날 이 대륙에는 에버리지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약 5만 년 전부터 다른 대륙에서 건너와 1700년대까지 약 75만 명 정도의 규모로 증가해 왔고 호주 대표들께 딩고라는 멍멍이와 공존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606년 호주 대륙에 백인들이 상륙합니다.
네덜란드의 탐험가 빌렘 얀스조는 1606년 2월 26일 이곳 카펀테리아만에 도착하였고 이렇게 호주 대륙에서 최초로 백인과 원주민들이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이렇게 개박살 난 백인들은 제대로 된 탐사도 못한 채 다시 네덜란드로 호다닥 도망갑니다.
이후 호주 대륙은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네덜란드 탐험가들에 의해 우연한 발견이 이루어지며 드러날 듯 말 듯 아주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600 27년 네덜란드의 탐험가 프랑스와 디즈셈 또한 또다시 항로 이탈로 인해 호주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렇게 쭉
1천 마일에 달하는 해안 지역을 탐사한 후 네덜란드 당국에 정식 보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이 아닌 네덜란드만 끊임없이 호주 대륙을 발견해 왔던 것일까요.
이는 호주 근처 자카르타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자카르타의 왕래 중에 항해 실수로 계속해서 호주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공식적으로 발견된 호주는 네덜란드가 세계 해상 패권을 장악했던 17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발견이 이루어졌고 호주 대륙을 네덜란드의 신대륙인 뉴홀란드로 명명하기까지 하며 그 세력을 점차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600년대에만 세 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해전 그리고 그 사이 계속해서 육지로 쳐들어오는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고 결국 그들의 패권은 영국 프랑스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170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빈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듯 서로 앞다투어 호주 대륙의 탐험대를 보내며 영향력 확보를 위한 경쟁을 지속했고 1770년 최종적으로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호주 대륙을 아주 샅샅이 뒤지고 염탐하며 영국영임을 선포했고 다른 대륙과 마찬가지로 호주에서도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영국 제국주의의 깃발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영국의 패권과 식민지 확보 또한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775년 미국의 독립전쟁
또 그 사이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쟁 1783년 미국에서의 영국군 완전 철수는 영국의 해상패권을 거세게 흔들고 있었고 본토에서는 상류층의 부패와 향락 그리고 하류층의 빈곤 질병 절도 폭력의 만연으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감옥은 넘쳐나는 범죄자들로 더 이상 수용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경범죄자들은 면책시켜버리고 중범죄자들은 단기간에 빨리 출소시키는 등
솜방망이 처벌이 이루어져 풀려난 범죄자들은 또다시 범행을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맙니다.
결국 영국 당국은 범죄자의 처벌 방식으로 솜방망이 처벌이나 사형이라는 양극단의 방법 대신에 해외 유배를 왕창 늘려서 아예 범죄자들을 영국 땅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부터도 영국은 17 18세기 동안 많은 범죄자들을 아메리카 13개 식민지주 같은 곳에 유배를 보내오긴 했었는데 미국의 독립 선포로 인해 이들은 새롭게 유배를 보낼 장소를 보완해 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호주가 이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787년 영국은 새로운 범죄자들을 박박 긁어 모아 약 700명의 죄수들과 그 외 선원 군인 기술자 등 총 15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이끌고 호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1788년 1월 20일 이곳 보터니만에 도착한 이들은 원주민들을 조우하게 되는데 의외로 영국인과 원주민들은 선물까지 주고받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가끔 죄수들이 원주민들 음식을 훔치다가 살해당하는 것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실제로 당시 호주로 간 영국인들은 사망 원인에서 굶주림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물과 식량이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국 본토에서는 계속해서 범죄자들이 호주 대륙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유배 이후 수년이 지나면서 영국인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확장을 이루어냈고 이렇게 뉴 사우스 웰스가 영국인들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유베즈 총독과 군인 장교들이 통치를 담당했고 평기를 다 마친 자유민들도 갈수록 늘어났으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 넘어온 영국 본토의 이주민들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갔습니다.
결국 1823년 영국 당국은 빠르게 성장해 가는 호주를 유배지에서 식민지로 전환하게 됩니다.
물론 원주민들의 권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 같은 영국인들의 영역 침범과 원주민들을 향한 무차별 총기 발포는 그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저항을 시작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태즈메이니아 지역에서 그 저항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이렇게 1824년부터 1830년까지 양 진영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을 검은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백인들은 전쟁 속에서 대부분의 원주민을 몰살시켰고 그나마 생존한 원주민들 또한 강제 이주와 병원균 감염으로 인해 결국 1873년 마지막 원주민의 죽음으로 종종 말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백인들은 아주 행복하게도 태즈메이니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러한 백인들에게 변변한 저항도 하지 않았고 영국인들에게 사냥토도 알려주고 식량 공급까지 도와가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백인들에게 몰살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공격적인 확장과 원주민들의 도움을 얻은 영국인들은 1788년 첫 이주 당시인 약 1500명에서 1850년 무려 약 40만 명까지 증가하며 점점 식민지로서의 유용을 갖추어 갑니다.
한편 원주민과의 전쟁 이후 백인들은 검은 전쟁이라는 학살에 대한 반성과 영국 내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원주민 살해에 대한 보호 정책을 뒤늦게라도 펼치기 시작합니다.
또한 1840년 영국 당국은 그동안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되어 왔던 죄수들에 대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죄수 유배를 점차적으로 줄여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868년 마지막 유배를 끝으로 호주로의 죄수 유배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참고로 이렇게 80년간 유배된 죄수들의 숫자는 16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합니다.
그동안 호주가 유배된 죄수들이 인구의 주를 이룬 지역이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1850년대부터 그 판도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금광의 발견으로 이어진 골드 러시로 인해서 말입니다.
뉴 사우스 웨일스와 빅토리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등등 호주 전역에 펼쳐진 금광 발견 소식은 그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1852년과 53년이라는 단 2년의 기간 동안 무려 10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호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1850년 40만이었던 인구는 1871년 170만 명으로 4배 가량이나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호주는 죄수의 유배지에서 이민자들의 신대륙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빠르게 유입되는 중국인들은 같은 시기 발발한 아편 전쟁과 맞물리며 호주 내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고 이 같은 충돌은 표준의 백인들의 뿌리 깊은 백호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인구와 경제 성장 그리고 이에 따른 호주 내 독립으로의 움직임은 결국 영국 당국의 호주 대륙 자치령 설립으로까지 발전합니다.
18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이후 사우스 웨일스 헤즈 메이니아
빅토리아 핀질랜드가 차례차례 자치정부를 지닌 식민지 자치령으로 공식 인정되었고 이 같은 식민지 주들은 각각 개별적인 국가처럼 독립적인 발전을 추구해 나가게 됩니다.
한편 이 같은 지역 내 발전은 각 주들에게 끊임없는 갈등과 경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영국 내 자치형 끼리 벌어지는 무역 관세 경제 영역에서의 분쟁은 이들의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칠 만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887년 통일 이후 강력한 열광으로 부상한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이
이곳호주 대륙에 국유기니에 대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영국과 호주 자치령들은 독일 제국의 호주 대륙 침범을 막아내기 위해 연방제 통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각 주들 간의 끊임없는 지역 감정과 대립으로 인해 논의는 10여 년간 지겹게 늘어져 왔고 1891년에 들어서야 연방 헌법 초안만 겨우 작성될 만큼 통합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아주 느리게 통합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던 와중
이번에는 일본이 한국 대만을 집어삼키고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태평양 전역을 넘보기 시작합니다.
이는 결국 또다시 호주 자치령들에게 공포감을 안겨다 주게 되었고 지지부진하던 통합 논의는 독일 일본이라는 외부의 세력으로 인해 급속도로 진전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01년 1월 1일 호주 자치령들은 드디어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로서 공식 출범을 알리게 됩니다.
이후 호주는 1차 세계대전에서 61명 6인니를 점령하여 본인들의 영토로 가져오게 되었고
이 같은 전쟁 과정에서 서서히 영국인이 아닌 호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1931년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의 독자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발표하였고 호주는 1942년에 이 헌장을 비준하여 온전한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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