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중국 시대 양녀이자 철권 통치자인 서태우의 인생과 온갖 악행들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말기 한풍 세 번째 황후로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0대 황제 치제의 생모이자 11대 황제 강서제의 이모이기도 한 서태훈은 47년간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죠. 서태울 성훈 여평나락 씨이며 이름은 나나였습니다.
공식 명칭은 효면 황후라 칭해졌죠.
서태후는 1835년 북경에서 말단 관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여러 지방의 관리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서태호도 어린 시절 관직 사회의 생리를 터득하며 자라났죠
다만 당시 남녀유별 사상 때문에 만주어를 배우지는 못하는 대신 학식 있는 관리의 딸로서 한문은 읽고 쓸 수 있을 정도의 가르침을 받았죠.
또한 자수나 악기와 같이 여성에게 필요한 기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훈은 17세의 나이에 뛰어난 외모로 청나라 9대 황제 문종 한풍제의 눈에 들어 국려로 뽑혔습니다.
서태후는 나라의 호아론 황실 정원인 원명원에서 지내게 되었죠.
하지만 서한 명의 후궁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낮은 등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왕실의 후궁에게는 계급 체제와 같은 등급이 매겨져 있었는데 서태호는 하위라고 볼 수 있는 6급에 속해 있었죠.
이에 태감에게 뇌물을 주기도 하고 일부러 황제가 자주 다니는 길목을 기웃거렸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외모를 최고의 미모로 만든 답시고 새똥으로 만든 목욕산으로 세수를 했으며 피부를 곱게 만들기 위해서 매일같이 진주를 갈아 마셨죠.
또한 매일같이 두 명의 산모를 불러다가 그 산모들 이 공급하는 신선한 모유를 하루에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는 그렇다 할 총애를 받지는 못했는데요.
이유는 한풍제의 국사에 참견하고 조언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한풍제는 서태후의 면전에 대고 교활하다며 비난했죠.
당시 청나라 황실은 후궁이 국사에 참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서태호의 행동은 오랜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죠.
한편 서태호와 비슷한 시기에 후궁으로 들어온 정여인은 단 네 달 만에 5급에서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서태훈은 항상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죠.
이 황후가 바로 효정현 황후 아무튼 서태우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음에도 황제를 향한 구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뛰어난 실력으로 환풍자에 관심을 크게 끌어 승은을 입고 의비에 책봉, 이후 1856년 서태호가 아들 동치제를 낳자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의 탄생에 한풍제는 크게 기뻐하며 책봉했습니다.
그렇게 서태후는후궁 생활을 정리하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죠.
이렇듯 총명한 아들과 새로운 탄생시킨 청조였지만 궁정 내부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습니다.
아편전쟁과 태평청국의 난이 터지는 상황이 계속 어린 군주가 나왔기 때문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서태훈
한풍제 총회를 하는 데 전력을 쏟아했기 때문에 동치의 양육을 포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출세를 향한 열망이 모성애를 이겼다고 있네요.
제 2차 아편전쟁 이후인 1860년 영국군과 프랑스 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서태후는 한풍제 동태우와 함께 열하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도 한풍제의 이복 여동생인 공혁흔이 나서 영국과 프랑스에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다시 되돌받았습니다.
북경 조약을 체결해 사태는 마무리되었죠.
하지만 다시 한 번 북경 지역을 러시아에게 점령당하자 한풍제는 화병을 얻어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서부터 서태후의 권력 장악이 시작됩니다.
이때 한풍제와 동태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자연스레 서태우의 아들이 동치제가 1대 목종의 직위했죠.
이후 서태후는 동치제의 나이가 여섯 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동태우와 함께 수렴청정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한풍제의 동생인 공친왕 혁훈 또한 의정왕으로서 정치 일생 전에 나서자 당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숙승과 재환 등의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단은 불만을 표출했죠.
이에 서태훈 피도 눈물도 없이 신유 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수령 청정을 반대한 모든 세력을 숙청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공친왕의 술수가 특히 대단했죠.
수렴청정에 성공한 태후는 동태호와 함께 섭정에 나섰습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서태후는 계속해서 정치의 실권을 잡으려 노력했죠.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 청나라는 외세
압력과 봉건질서의 붕괴로 근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서태후는 중국봉과 용장 등의 한인 관료를 등용하고 그들에게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는
고급강병 운동인 양무 운동을 진행시켰죠.
서태후의 섭정은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에 끝나야 했지만 서태후는 온갖 꼼수를 부려 국사를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계속해서 이어나갔습니다.
강 씨 동치제는 엄격하게 대하는 생모 서태호보다 권력력이 적고 온화한 동태우를 더 따르고
좋아했는데요.
눈치가 빨랐던 서태후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고 동치제의 편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치제가 15세가 했을 때 동태호와 서태후는 각자의 신부감을 추천했는데 동치제는 서태후 추천의 신부가 아닌 동태호가 고른 아로특 씨를 황후로 맞이하자
동치제를 향한 증오심은 더욱 커져결국 화를 참지 못한 서태후는 동치제에게 학업에 방해가 되니 황후의 침실에 드나들지 마라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서태후의 엄한 관리 하에 황후와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던 동치제는 환관의 권유로 홍등가에 드나들었고 끝내 매독
매독에 걸린 동치제의 온몸에는 붉은 반점이 생겨났고 결국 동치제는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충격적인 사인이 천연두로 기록되어 어쨌든 동치제가 세상을 떠나자 청이 다시 한 번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통치자의 황후가 임신 중이었으므로 배 속의 아이가 만약 아들일 경우 황제의 즉위
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가만히 있을 서태후가 아니죠.
군대를 동원해 전통적인 재위 계승 따위는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여동생과 한풍지의 또 다른 동생인 순왕혁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해 황제로 삼았죠.
나이가 바로 제 11대 덕종 광서제이며 재위 당시의 나이는 겨우 네 살에 불과했습니다.
동치제가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와 같이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수렴청정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죠.
서태후의 권력 행사를 위한
꼭두각시 황제일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서태후는 수렴청정이라는 명분 하에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 정권을 장악해 갔습니다.
명목상으로는 동태우 또한 섭정에 나서야 하는 형식이었지만
권력력이 강했던 서태호는 동태호의 간섭을 못마땅히 했죠.
그러던 1881년 동태우의 사망 소식이 들려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진탕으로 인한 병사였죠.
병사도 동치제와 마찬가지로 서태후의 계략이었다는 설이 존재합니다.
서태우가 동태우에게 떡을 보냈는데 그 떡이 독이 들어 있었다는 설이죠.
하지만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근데 뭐 일부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개연성이 높다고도 하고 서태호가 했던 만행들을 보면 죽이고도 남았겠네요.
어쨌든 서태후는 눈의 가시와 같았던 동태호의 사망을 기회로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같은 라인이었던 공친왕 혈흔까지 숙청했죠.
이제 청조의 정치는 완전히 서태후의 영향에 있었습니다.
한편 광서제는 서태후의 엄격한 관리 아래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사소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 쓰며 돈독한 모자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죠
광서제가 학문을 배워 수업을 참관한다든가 수업을 마칠 때 광서제를 불러 그날 공부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광서제가 19살이 된 해인 1889년 내년에도 서태우의 집착은 계속되었는데요.
성혼한 나이가 된 광서제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데려왔지만 서태훈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또 다른 조카인 정분을 황후로 세웠습니다.
심지어 후궁까지 서태우가 직접 골라주었죠. 이때 당시 서태우는 명목상으로 왕실 정원인 유아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사에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일일이 참견했죠.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양무 운동 또한 실패로 돌아갔죠. 전쟁 패배의 요인을 서태후 때문이라고 확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청일전쟁 당시 서태후는 자신의 생일 파티만을 신경 쓴 채 전쟁은 나몰라라 하고 있었습니다.
파티 비용으로 쓰인 공금은 무려 천만 냥에 달했죠. 또한 아편전쟁 당시 소실되었던 이왕원을 다시 더욱 화려하게 재건했습니다.
서태훈은 자신의 궁궐 정원인 이화원을 꾸미는 데 집착해 무려 3천만 냥을 쏟아부었죠. 이와 같은 낭비는 군비 부족이라는 심각한 상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청나라 해군의 전력은 규모 면에서 상당했던 반면 이를 관리하는 증강하는 비용을 제대로 조달하지 않았던 것이죠. 결국 부족하다며 화약 대신 엉뚱한 콩 따위를 넣어 관리비를 줄이고 제대로 된 훈련하지 않은 채 전쟁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청나라의 대참패로 막을 내렸죠.
패전 결과 청나라는 2억 량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대만을 비롯한 여러 섬을 하랑하는 불평등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한편 친정을 시작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양기초 등의 유신파 세력과 결탁했습니다.
위안스카이 등의 보수파 대신들과 쿠데타를 감행하는 바람에 변법은 103일 만에 진압되고 말았죠.
결국 광서제는 서태우의 무술 정면에 의해 유폐되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병에 걸렸다는 거짓말을 하고 다시 섭정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핵심 인물들을 모조리 죽이기까지 했죠.
섭정에 오른 서태후는 대신 단 친왕의 아들인 부준을 주기 시키려 했지만
서구 열강은 광서제의 폐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동시에 각국의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죠.
그렇게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서태훈은 의화단을 부실려 열광 파국이 대해 선전 포고를 했죠.
의화단에 의해 습격을 받은 8개국의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베이징에 위치한 궁전인 원명원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빵필승의 원칙을 뒤엎어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피난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먹을 것과 물도 없이 이틀을 굶었죠.
피난으로 심신이 폐해진 서태훈은 북경에 남아 있던 경친왕 혁광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1901년 평등 조약인 신축 조약이 체결됐죠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앞서 체결한 신문호 특기 조약과 비슷하게 전쟁 배상 현금을 지불하고 북경의 외국 상주하는 것을 인정하는 등 12개 조의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렇듯 청나라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각해져 가자 서태후는 정신을 차린 것인지 변화를 맹세하고 새로운 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칙명을 선포했습니다.
이 칙명의 본질은 서양으로부터 배우자는 것이었죠.
이후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어 서구의 공사부인들 초대해 대접하는 한편 사치 충동을 폭발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식탁은 먹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식탁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죠.
서태후의 사치는 권력을 장악할 때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실제로 한 끼 식사는 각종 사내 진미가 128가지나 되었는데 이 식사비를 따져보면
3kg이나 들었죠. 그 당시 100은 3kg이면 5천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명의 많은 농민들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음식을 세 번 이상 먹지 않을 만큼 까탈스러웠고 기름진 음식과 돼지고기와 같은 육식에 미쳐 있었죠.
서태호는 금박이 입혀진 비단 옷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는데요.
금속을 제외하고 옷만 해도 3천여 상자가 하루에 몇 번씩 바꿔 입는 사치를 보여줬죠 뿐만 아니라 서태우는 괴팍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신들이나 내시 그리고 궁녀들은 서태후의 앞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잘못해서 심기를 건드렸다간 목숨이 날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서태후는 심한 탈모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치장을 할 때면 머리 손질에 특히 신경을 썼습니다
만일 서태후의 머리를 빚을 경우 머리카락이 한 개라도 빠진다면 머리를 빚은 궁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이 날아갔죠.
이에 궁녀들은 일부러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빚어 줬습니다.
소매가 넓은 옷을 입으면 서태후의 머리카락이 넓은 소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서태호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죠.
또한 서태호는 자신 앞에서 기침을 하거나 실수를 한 내시나 궁녀들에게 사람의 변인 인분을 먹였을 정도로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앞서 산모들의 모유를 먹는 행위도 계속되었는데요. 산모들은 목욕을 한 후에 젖만 내놓고 붉은 천으로 몸을 담았습니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서태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젖을 먹여야 했죠. 이는 서태우가 본인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 누워서 통하는지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고 통화하는지를 알 수 이화원 전화 설치를 거부하기도 했죠.
서태후는 권력과 식욕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성욕이 넘쳐나 매일 밤마다 향약을 즐겼습니다.
중국 전역에서 젊은 남자들을 은밀하게 모집해 관계를 가졌죠.
서태후의 은총을 받아 침실로 들어간 남자들을 광란의 밤이 끝나면 어김없이 사형당했습니다.
이유는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만들기 위해서였죠.
이렇게 서태후의 밤 쾌락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멀어진 남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소문을 들은 남자들은 쾌락의 도구로 뽑히지 않기 위해 관리들에게 금품을 바쳤죠.
평상시 기름진 음식 특히 즐겨 먹었던 서태후는 복부 팽창과 위기능 저하로 이질에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매일같이 여러 과식을 한 탓에 병이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1908년 11월 15일 7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권지 놓지 않았다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금 상태에 있었던 광소재를 독살하고 서둘러 자신의 손자인 푸이를 황제로 세웠죠
그제서야 서태후는 자신과 같은 여인이 정사에 관여한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광서제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 눈을 감았습니다.
푸이는 겨우 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통제로 역사에 남았죠.
중국 시대의 악녀이자 철권 통치자인 서태호의 인생과 온갖 악행들 이번 표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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