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세종이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잔재에 있는 모든 악몽과 슬픔을 뒤집어 쓰고 갈 것이니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어진 성군이 되어라 우리가 이걸 들여다보면 도대체 태종이 왜 이렇게 주위에 사람들하고 갈등하고 이렇게 했는지 짐작이 되죠.
창업과 수성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조선 태종입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이방원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권력을 잡으려 한 사람 이런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죠.
그래서 이방원을 통해서 권력이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한테는 이방원이 어떤 이미지냐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권을 쥐었고요 그 전에 조선 건국 과정에서도 정몽주를 죽이면서 조선 건국을 이루어내는 데 일등 공신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왕위에 오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죽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왕위에 올라서도 아버지 이성계하고도 반목을 일으키고요 새어머니하고 사이도 갈등을 그리고 부인과 자식에게까지도 여러 가지 갈등을 빚었던 태종 이방원이 왜 이렇게 주변 사람들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키면서 권력에 집 집착하는 이미지로 남게 됐을까 이방원을 통해서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볼까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인물 다들 아시죠 제가 너무 쉬운 질문을 던진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요.
누구죠 그렇죠 태조 이성계입니다. 이 태조 이성계하고도 이방원이 여러 가지 갈등을 빚게 되는데요.
이성계의 집안을 들여다보면 이성계에게는 원래 본 부인이었던 신이 왕후 한씨라는 부인이 있었고요 그리고 이성계가 출세를 하면서 개경에서 얻었던 두 번째 부인이 있습니다.
강 씨라고요
첫 번째 부인 같은 경우에는 조선 건국 한 해 전에 벌써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조선 건국한 이후에는 이 강씨만 조선에서 처음.
왕후가 되는 인물입니다 한 씨하고 사이에서 아들이 여섯 있었습니다.
이 아들 여섯 중에요. 여섯번째 아들은 일찍 죽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거론이 되지 않았는데 첫 번째가 이방우고요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빨리 해야 됐던 일이 세자를 책봉하는 일이었습니다.
근데 이 세자를 책봉하는 데 있어서 당연히 첫째 아들이 세자가 돼야 되겠죠.
그럼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성계 같은 경우에는 첫째 아들을 세자로 삼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첫째 아들이 조선 건국을 끝까지 반대했거든요.
그래서 첫째 아들이 부제안을 통해 다른 아들을 세자로 책봉을 해야 됐어 첫째가 이방우고요 둘째가 이방과고요 그리고 셋째가 이 방의 넷째가 이방관 그리고 이 다섯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방원입니다.
그런데 세자를 누구로 책봉을 하냐면 막내 아들이었던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을 합니다.
당연히 누구의 입김이 작용했겠어요.
왕후였던 강 씨의 입김이 굉장히 작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 씨 말고도 세자 책봉에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냐면 정도전이었죠.
정도전이 사실은 조선이란 나라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나라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발전된 나라로 끌어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텐데그중에 가장 큰 고민이 뭐였냐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조 국가죠.
그러니까 왕이 나라를 운영해가야 되는데 이 왕이라는 건 세습 체제이기 때문에 훌륭한 왕이 태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왕이 될 수도 있죠.
그러니까 왕에게만 조선을 맡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왕보다는 정치는 누구에게 맡겨야 되느냐 재상에게 맡겨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왕의 역할은 제상을 잘 뽑아놓으면 그 제상이 위로는 왕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잘 통솔해서 나라를 잘 운영할 수 있을 거다.
해서 정도전이 추구하는 정치 형태는 재상 중심 정치를 추구했던 겁니다.
그런 제상 중심 정치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왕이 제 멋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정치를 해가야 될 겁니다.
그러려면 그런 왕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 필요했겠죠.
세자 교육이요 근데 이런 교육이 큰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릴 때일수록 교육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겠죠.
그래서 그런 왕을 그런 조선의 롤 모델이 될 만한 왕을 만들고자 이 어린 이방석에게 세자 교육을 충실히 시켜서 그런 롤 모델 같은 왕을 만들고자 했던 거죠.
이렇게 이방석이 세자가 되니까 가장 불만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죠.
실제로 조선 왕조의 개국의 가장 큰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원이 불만을 가지게 됐죠.
그래서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의 이복 형제이던 이방범과 이방석을 죽이게 되죠.
그리고 권력을 잡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진 않고요 이런 아들들 간의 다툼에 신물을 느낀 이성계가 왕위를 내려놓게 그래서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성계는 물러 앉게 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정종으로 즉위를 하게 되고요 정종이 왕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이방원이 가지고 있었죠.
그러던 차에 다시 이방원에게 또 권력을 차지하려고 맞선 형제가 있었습니다.
누구냐면 바로 위의 형제였던 이방관이었어요.
이방 간이 이방원에게 맞서면서 다시 두 번째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이걸 우리가 2차 왕자의 난이라 그러고요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방원의 세력은 더 커지게 됐고요 결국 정종도 왕위를 그냥 나는 내어놓으란다 그리고 마음 편하게 살란다 하고는 정종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됩니다.
정종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라는 뜻을 밝히니까 이성계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하라고도 하지 못하겠고 하지 말라고도 하지 못하겠다라고 얘기를 했답니다.
이래도 마음에 안 들고 저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왕자 연안을 거치면서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죠.
태종의 직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왕이 된 아들이 보기 싫어 이성계는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버립니다.
자 여기 함흥으로 떠나버렸어요. 이성계가 함흥으로 떠났다는 말은 태종을 어떻게 보면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태종은 누가 봐도 왕자의 난을 거쳐서 왕위에 오른 사람이죠.
그러니까 민심도 다 알고 있다라는 거죠.
그래서 태종이 권력을 다 휘어 잡았지만 태종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왕위의 정통성이라는 겁니다.
근데 이 정통성 문제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와서 인정해주면 끝나버리죠 그래서 어떻게든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셔오려고 함흥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보내는 사람마다 소식이 없죠.
들리는 소문에는 죽임을 당했다. 그럽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거죠.
보내는 사람마다 소식이 없으니 골똘이 생각한 끝에 도대체 어떤 사람을 보내면 아버지가 죽이지 않고 그 사람 말을 들어줄까 그래서 고민한 끝에 누구를 보내냐면 박순이라고 이성계의 고향 친굽니다.
아끼는 고향 친구를 보내게 되죠. 박순에게 꼭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셔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박순이 함흥으로 떠나게 됩니다.
박순이 함흥으로 떠나면서 나를 데리고 가요 어미 말과 새끼 말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함흥에 도착해서 이성계가 머물고 있는 함흥 궁궐에 새끼 말을 궁궐 바깥에 묶어놓고 어미 말만 데리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어미 말을 묶어두고 이성계를 독대하러 들어간 거죠.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바깥에서 어미 말이 보이지 않으니까 새끼 말이 계속 울어댑니다.
어미 말을 찾아서 그럼 어미 말은요 새끼 울음 소리를 듣고 새끼를 달래느라 또 같이 울겠죠.
밖에서 계속 말울음 소리가 들리니까 이성계가 밖에서 무슨 일이냐 한 거죠.
그러자 박순이요 사실은 자기가 새끼 말과 어미 말을 데려와서 이렇게 따로 묶어뒀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찾는 울음소리다라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하물며 저런 동물들도 자식이 부모를 찾고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데 사람이 오죽하겠느냐 그러니 이방원이 한 짓은 밉지만 그래도 부모가 돼서
자식을 용서해야지 어쩌겠느냐 하고 이성계에게 얘기를 합니다.
그 말에 이성계의 마음이 돌아섰어요.
하지만 곧장 따라가지는 않았고요 나중에 무학대사가 올라와서 또 한 번 설득을 하고 모셔가면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 이방원이 굉장히 기뻤겠죠.
그래서 친이 마중을 나갑니다. 왕이 직접 행차를 나왔으니까 장막을 치겠죠.
일종의 장막을 친 겁니다. 장막을 치면서 혹시나 해서 그 당시 태종 이방원의 책사가 있었는데 하륜이라는 책사가 있었어요.
이 하륜이 혹시나 이성계가 이방원을 해코지 하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장막을 치면서 기둥을 일부러 둘레가 굵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계가요 와서 이방원을 보자마자 아들에게 화를 탁 겨어버린 겁니다.
그러자 이방원이 냉큼 그 기둥 뒤에 숨어서 화자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요 그래서 그 지역에 나중에 이 다리가 들어서게 됐는데 이 다리를 살고지 다리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화를 겨누는 건 이걸 끝으로 내가 너를 용서하려고 한다 하면서 마지막으로 혼내려는 행동이 아니었나 그렇게 보입니다.
이성계가 이방원을 어쩔 수 없이 조선 왕조를 위해서 이제 용서를 한 거였죠.
나중에 이성계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이 이성계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이렇게 남깁니다.
나는 그냥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 라고 유언을 남겼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방원이 생각을 해보니까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잖아요.
그래서 왕릉을 어디에 어떤 기준으로 왕릉을 조성하느냐가 이후에도 규칙처럼 될 건데 조선을 개국한 왕의 능을 함흥으로 너무 멀리 모실 수 없다 해서요.
이 서울 외곽의 릉을 모시게 아주 명당자리로요 지금의 구리시거든요.
여기에 아버지의 무덤을 조성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유언을 지키지 못한 거죠.
이게 마음에 걸렸던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고향인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다가 이렇게
잔디 대신에 심었어요. 그래서 이 태조의 건원릉은 늘 가을이 되면 억새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게 되고 그래서 늘 봄이면 사람들이 또 다 억새를 잘라주는 이런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 무덤 속에 묻혔을 태조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괴시 만지고 끝까지 내 뜻을 거스르는구나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태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방원과 아버지 사이에서는 갈등과 반목이 끊이질 않았던 거죠.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태종 이방원은요 새어머니하고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 새 어머니가 신덕왕후 강씨죠 신덕왕후가 태조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죠.
태조하고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났었구요.
태조가 출세하면서 새롭게 얻은 부인이었고 이 부인 집 안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출세하는 데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선을 건국하는 데 있어서 이방호 못지않게 내조를 했던 인물이 신덕왕후 강씨였거든요.
그러니까 태조가 신덕왕후를 굉장히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신덕왕후가 돌아가시자 크게 상심에 빠져서 무덤을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곳에 늘 가까이 볼 수 있게끔 가까운 곳에 무덤을 조성하라 그러고 무덤을 아주 호화롭게 정성을 다해서 꾸몄습니다.
이 무덤을 정릉이라 그래서 처음. 무덤이 있었던 동네를 정릉동이라 부르기도 하거든요.
이렇게 신덕왕후의 무덤을 잘 조성을 해놨고 다행스럽게도 신덕왕후는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건 보고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건 보지 않으셨던 거죠.
그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어쨌든 이 태조가 아주 정성스럽게 가꿔 놓은 신덕 광우의 무덤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고는 공분을 없애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장하라 합니다.
이유가요 옛 제왕들의 무덤이 다 도성
밖에 있는데 도성 안에 정릉이 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해서 무덤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장을 시키라 하고요 이 무덤을 장식해 놓은 석물도 다 없애버리라 하고 그리고 정자가 같은 제사를 지내는 그런 곳들도 다 없애버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덕 왕후는 둘째 부인이기 때문에 후궁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후궁으로 왕후가 아니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리고 그러니까 이 무덤도 릉이 아니라 원으로 격화가 됩니다.
그리고 돌아가시면 위폐라 그러죠 신주라 그러기도 하는데요.
이 위폐를 종교에 모이거든요.
그런데 이 종묘에서 신덕왕후의 위패도 없애버리라고 합니다.
왕비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복수를 합니다.
국수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청계천이 사실은 없던 물길이었는데 그 물길을 낸 이유가요 한강이 비가 오면 빗물이 빠리 빠져나가지 않아서 늘 홍수 피해가 많았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청계천을 일부러 만들었는데요.
이 청계천에 광통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처음에 흑다리였어요.
그런데 1410년에 비가 굉장히 많이 와서 이 흙다리가 무너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는
그러자 그 다리를 흙다리가 아니라 돌다리로 만들어라 하면서 신덕왕후의 무덤 병풍석이라고 그래서 무덤 둘레를 둘렀던 그 돌들로 이 다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광통교가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만든 돌다리인 거죠.
그런데 이 돌 다리에 있는 이 돌을 왕후의 무덤에 썼던 그 돌로 이 다리를 만들라는 거죠.
다리가 뭐예요.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이잖아요.
우리가 청계천을 후에 복원을 했었죠.
복원을 하고 보니까 실제 광통교에 쓰였던 돌에 이런 화려한조각이 돼 있는 신덕왕후에 병풍석으로 썼던 돌들이 발견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신덕왕후를 굉장히 미워했다는 거죠.
이방원이 근데 이방원이 신더 광우를 단순히 새어머니라서 미워했다.
혹은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는데 신더 광후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에 새어머니를 미워했다.
이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게요 실제 이성계가 아들들이 여섯이 아 두 번째 부인하고의 사이에 아들까지 합하면 아들이 여덟이 있었는데요.
이성계가 초기부터 이방원을 굉장히 이뻐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였냐면요. 이성계는 무관이죠.
그런데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에요.
이 상황이 고려 시대 상황이거든요.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이 문과가 있고 문과가 있잖아요.
근데 고려 시대에는 과거 시험이 문과가 없었어요.
과거 시험 그런 문과밖에 없었거든요.
무인의 자식이 문과에 급제한다는 건 거의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 이성계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방원이 문과에 합격을 한 겁니다.
그것도 문과가 삼 년에 한 번 시험을 치르는데 삼십삼 명을 뽑거든요.
근데 그 중에 십칠 등을 했으니까 꽤나 잘한 성적이라는 거죠.
그러니 이성계가 늘 이버러처럼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했다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고 다녔던 거죠.
그러니까 사실은 이 이방원과 이성계의 관계는 이성계가 이방원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들 바보였다라고 봐도 되는 거죠.
이 이방원을 과거에 합격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였냐면 바로 새어머니였습니다.
이 새 어머니가 봤을 때는 이방원이 굉장히 출중한 능력이 있어 보이거든요.
그래서 한양에 데리고 와서 이 아들들을 돌보면서 이방원을 뒷바라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게 만든 거죠.
뿐만 아니라 신덕왕후도 굉장히 명석한 인물이었고 여자지만 굉장히 담대한 인물이었고 이방원 역시도 굉장히 지략이 뛰어나고 또 포부가 큰 인물이었어요.
이 두 사람이 너무나 케미가 좋았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도 이 두 사람의 역할이 가장 컸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아주 죽이 잘 맞았던 거예요.
그래서 신덕왕후도 어떻게 평소에 얘기를 했냐면 이방원에게 니가 내 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참 안타깝다 할 정도로 니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할 정도로 이렇게 아꼈었고요 이 이방원 역시도 이 새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잘 따랐다는 겁니다.
그렇게 의기투합이 잘 됐던 두 사람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세자 책봉 문제로 완전히 갈라지게 된 거죠.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겁니다. 우리가 보통 친하던 사람이 배신을 하게 되면 어때요 그 증오가 그 배신감이 더 크겠죠.
그래서 어쩌면 단지 새어머니라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관계였다가 이렇게 틀어지게 되면서 이방원이 새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안 좋아진 게 아닌가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래서 신덕왕후는 무덤 자체도 격화되고 명예가 실추가 된 거죠.
그랬던 신덕왕후의 정릉이 언제 명예 회복이 되냐면 조선 후기 현종 때 와서 현종이 누구냐면 숙종 바로 앞에 왕이거든요.
그러니까 조선 후기 저 뒤에 가서 거의 한 400년쯤 후에서야 복권이 됩니다.
그래서 현종 때 와서 이제 신덕왕후의 무덤을 릉으로 복귀시켜주고요 신덕왕후 위패를 종묘에 모셔주게 되고 정자각도 새로 세우고 석물도 새롭게 마련해주고 그래서 왕릉의 형태를 갖추어주게 되죠.
현종 때 이렇게 제대로 된 정릉의 형태가 갖추어지자 그날 이렇게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비를 세원 지우라고 그래서 이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다.
이렇게 사람들이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와 그리고 새어머니와 굉장히 큰 갈등을 빚었던 인물이다라는 걸 알 수가 있겠죠.
게다가 이번에는 누구하고요 이번에는 부인과도 굉장한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 원경왕후입니다.
원경왕후 민시라 그러는데요. 이 민시가 집안이 굉장한 집안이에요.
영민시라 그래서 왕비도 많이 배출했던 집안이고 대대로 명문가에 굉장한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이 원경왕후하고 태종 이방원이 같은 능에 묻혀 있어요.
헌릉이라 그래서 조선 왕조 중에서는 부부가 함께 이렇게 쌍릉으로 나란히 조성이 된 게 이 헌릉이 처음입니다.
근데 조금 이따 보면 알듯이 이 둘 사이가 사실은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나란히 있는 게 보는 입장에서도 편치 않아 보입니다.
이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반목을 가지게 됐느냐 하는 건데요.
이 태종의 가계도를 보면 이 원경왕후의 사이에 아들의 딸이 넷이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금술은 좋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여질 수도 있는데요.
이 원경왕후 집안에서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데 굉장히 큰 공로를 했습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원래 사병을 길러야 됐었는데 그 사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지원해 줄 수 있는 그 재력이 이 민씨 집 안에서 나왔거든요.
뿐만 아니라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에 이 원경하고 민씨의 남동생들이 왕자의 난을 함께 도왔어요.
굉장히 큰 공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서 왕위에 오르는데 민씨 집안이 굉장한 내조를 한 거죠.
그런데 태종이 왕에 오르고 나서 왕실은 번창해야 된다라는 이유로 후궁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후궁을 무려 열두 명을 들인 거예요.
그러니 원경왕후가 속에 천불이 나겠죠.
그래서 따지고 듭니다. 뭐라고 따졌냐면요.
상관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관과 더불어 이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환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으니 어찌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따졌죠.
그랬더니 태종이적반 하장도요 정비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을 품으니 내가 폐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라고 더 강하게 나옵니다.
폐출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죠. 그러더니 이 원경왕후가 강하게 맞서면 맞설수록 그 화를 어디에다 푸냐면요.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에게 붓니다.
그래서 원경 어후 집 안에 남동생들을 죄를 주게 되죠.
이 당시에 세자가 누구였냐면요. 큰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이 세자였습니다.
이 세자를 태종이 굉장히 아꼈어요. 왜냐하면 이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 아들이 아까 넷이 있었잖아요.
첫째 아들이 양녕대군인데 이 양녕대군을 얻기 전에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어
그리고 나서 얻은 아들이 양녕대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래서 이 양녕대군을 귀히 여겼고 이 양녕대군이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아이들이 주로 외가에서 자라거든요.
외가에서 자라다 보니까 아무래도 양녕대군이 성장하면서 세자가 됐는데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겠어요.
외삼촌들의 영향을 많이 받겠죠. 그리고 이 양녕대군이 나중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이 외삼촌들의 입김이 굉장히 크게 작용을 하게 되겠죠.
그래서 이걸 염려한 태종이민무질과 민무구 두 형제를 양녕대군의 뒤에서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로 이 두 사람을 귀양 보내고 결국 사사시킵니다.
죽게 만들어요. 그러니 원경왕후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더 커질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이 두 형제로 끝난 게 아니라요 한 5년 후에 다시 또 셋째 넷째 동생까지 민율 민무해 형제까지도 귀양 보내고 자결하라 명을 내립니다.
이 민씨와 그 남동생들이 왕자의 난을 성공을 시키는데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서 친정 집안이 몰락해버리고 남동생 렛을 잃게 된 거죠.
뿐만이 아니라 그 일로 아버지조차도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친정 아버지가요 그러니 원경왕후와 이 태종과의 사이는 더 이상 화해가 어려운 갈등이 굉장히 깊어지게 된 겁니다.
그렇게 남동생 넷을 다 잃고 친정이 몰락하는 일을 겪게 됐고요 더 나아가서 아들이 내 있었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양녕대군이 있고요 효령대군이 있고 충녕대군이 있죠.
근데 그 밑에 성령대군이라고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아들은 원경아호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 얻은 아들이었어요.
굉장히 귀한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이 일찍 요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상처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더 이상 태종에게 맞서고 싶은 힘도 없고요 그래서 조용히 아들을 추모하면서 저래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돌아가시게 됐어요.
그리고 신록 어디에도 두 사람이 화해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랬는데 이 두 사람을 같이 이렇게 나란히 쌍릉에 묻어놨죠.
원경하고 죽어서도 편치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헌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헌릉을 조성했던 때가 세종 때였겠죠.
세종이 헌릉을 조성하면서 두 무덤을 이렇게 난간석을 이어 놨습니다.
이 아버지의 어머니가 저승에서라도 화해하기를 바라는 태종의 마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이렇게 원경왕후하고도 태종의 반목이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급기야 아들과의 반목도 이어지게 되는데요.
우리가 알다시피 세종과의 반목도 있었지만 먼저 세종의 형이었던 양녕대군과 갈등이 있었기
세종 이방원은 자신이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었죠.
그리고 조선의 나라가 유교 정치를 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유교 공부에 아주 열중하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양녕대군은 갈수록학문의 뜻을 멀리하게 되고 여색을 탐하게 되죠.
거기다가 외삼촌 넷이 돌아가시게 됐는데 그게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자신을 아주 잘 챙겨줬던 이 외삼촌들이 다 돌아가셨는데 자기 때문이고 또 자기가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라는 이유 때문에 굉장히 상심이 컸고 또 상대적으로 아버지 이방원이 양녕대군은 굉장히 아꼈지만 또 아끼는 자식일수록 엄하게 한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태종이 굉장히 엄하게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엄한 아버지 밑에서 점점 엇나가게 된 거죠.
그래서 17세부터 막 기방을 드나들고요 기생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눈 밖에 나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많이 일으켜요 예를 들면
큰아버지의 어떤 종종이 아끼는 기생을 자기 여자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유부녀 가리지 않고 곁에 둔다거나 가장 결정적인 게 어리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어리를 보고 반하게 됩니다.
양영대군이 근데 이 어리라는 여인이 그 당시 사대부가의 첩이였거든요.
조선 시대가 첩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남의 여자를 건드리는 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사대부가의 첩을 데려와서 자기 여자로 만들어 버리고 이 어리를 역시 궁궐로 데리고 오는 거죠.
이런 일이 알려지자 결국 태종이 크게 꾸짖고는 그 어리를 내쫓아버립니다.
근데 그 어리를 잊지 못하고 다시 어리를 몰래 궁궐로 불러들였다가 임신까지 시키는 일이 벌어지게 된 거죠.
그 일 때문에 태종이 크게 경로하게 되고요 어리를 쫓아내고 양영대군도 폐위시켜버리는 거죠.
그러면서 태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가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 있었는데 오직 그 잘못을 직접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면서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하고 폐쇄자시킵니다.
이렇게 계속 감싸줬었는데 태종 이방원이 머리를 쫓아버리자 머리가 자결하게 되거든요.
그러자 아버지에게 맞서게 돼요. 아버지는 그 많은 후궁을 두면서 나는 왜 안 되냐 하면서 맞서다 결국 이렇게 폐쇄자가 돼버립니다.
그리고 양녕대군은 세자에서 대군으로 격화되고 조용히 지내다가 돌아가시게 되죠.
그런데 양녕대군에 대해서요. 일설에는 자신의 동생 충녕이 굉장히 뛰어나다라는 걸 알고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라는 믿음이 있죠 진위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데요.
실록에는 분명히 양녕대군이 폐쇄자가 될 만한 나쁜 짓들을 많이 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을 거다라는 그런 믿음은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거든요.
조선 왕조를 미화시키기 위해서 후기에 나타난 말이 아닌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걸 또 뒷받침해주는 자료 중에 보면 곧 이어서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지죠 그때 실제로 수양대군을 부추켰던 인물 중에 한 인물이 이 양영대군이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양년대군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던 인물로 볼 수가 없다라는 거죠.
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었던 인물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양녕이 폐위되고 충영 대군이 세자로 책봉이 되고요 충영 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바로 두 달 만에가 태종이 양위를 해버립니다.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거죠. 근데 왕위를 넘겼지만 여전히 군권은 이 이방원이 잡고 있었어요.
이 세종의 장인이었던 인물이 시몬이라는 인물입니다.
이 시몬을 영의정으로 발탁해요.
세자가 바뀌었으니까 그걸 명나라에 알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명나라의 사절단으로 세종의 장인을 보냅니다.
이 시온이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갔다.
오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냐면요.
이 조선 안에서 강상인이라는 사람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였냐면 왕은 지금 태종입니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은 상왕으로 올라앉은 거거든요.
현재 왕은 태종이지만 군권을 태종이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하들 입장에서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야 되느냐 군권도 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되는데 지금 두 사람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느냐 이게 맞는 거냐 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 말이 알려지게 되면서 강상인이란 사람이 반역죄로 걸려 들어오게 되고 이 강상인과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이 모조리 잡혀 들어가게 되는 거죠.
함께 잡혀간 인물 중에 누가 있었냐면 이 시온의 동생이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시온까지 걸려 들어가게 생긴 겁니다.
근데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게 세종이 심온을 명나라의 사절단으로 보낼 때 세종이 왕위에 올랐으니까 시온이라는 사람이 새로운 실세가 됐겠죠.
장 안에 굉장한 사람들이 다 심온이 명나라로 출발하는 자리에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겁니다.
이러한 소문을 태종이 들은 거죠. 그럼 태종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겠어요.
아 시몬이 이제 굉장한 권력을 가지게 될 위험 인물이구나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시온이 명나라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바로 체포합니다.
그리고는 처형을 하게 되죠.
그래서 세종의 장인까지 죄를 지어서 사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반역죄에 연루가 됐기 때문에 장모는 관노로 그 자식도 관노로 떨어지게 됩니다.
집안이 완전 몰락해버린 거죠. 그러자 대신들이 또 맺혀서 뭐까지 주장하게 되냐면요.
시온이 대역죄로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 시온의 딸인 토원왕후 그러니까 세종의 부인도
폐비시켜야 된다라는 거죠. 그러자 태종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시온이 비록 중재를 범하였으나 공비가 여기서 소호 나무를 얘기하거든요.
세종의 부인 공비가 이미 주상에 배필이 되어서 아들을 많이 둔 경사가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에 비할 수 있으랴 하면서 소어 나오는 그대로 왕후 자리에 두겠다라는 겁니다.
실제로 세종과 소원 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여덟이고 딸이 둘이거든요.
그러니 이 소원왕후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거죠.
근데 이건 다르게 생각해 보면 만약에 소은 왕후를 폐출시키고 새로운 왕후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그 왕후의 집안도 또다시 외척이 될 거잖아요.
그럼 태종 입장에서는 그 외척도 또 쳐내야 되겠죠.
그러니 소원나무는 건드리지 않고 소어나우는 집안만 몰락을 시킨 겁니다.
그러니 이 세종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자신의 처가가 몰락을 해버렸죠.
세종이 세종의 치세 동안 정말 훌륭한 일을 많이 했지만
세종의 마음속은 늘 왕위에 오른 초창기부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누구 때문에요. 아버지 때문인 거죠.
여기는 심온의 무덤인데요. 나중에 문종 때 오게 되면 명예회복이 됩니다.
그리고 이 태종이 미안해서였는지 심온을 처형을 하자마자 원래는 대역죄로 처형이 되면 참수되거나 거열형으로 사지가 찍히는 형벌을 받게 되고 그 목이 효수가 돼야 되죠
그런데 시모는 사사하라고 명을 내리고는 그 시신을 정말 명당자리를 골라서 무덤을 만들어주라 합니다.
그래서 시모는 지금의 수원이 있는 지역에 굉장한 명당 자리에 묻혀 있다.
그러고요 이 집안은 문종 때 명예회복이 되고 이후에도 여전히 번창을 하고 굉장히 많은 영의정 좌의정 배출하는 그런 명문 집안으로 번창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 심온이 강상인의 죄에 연루되어서 죽임을 당했다라고 적으면서 바로 곧 이어서 뭐라고 적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가 마흔넷이었다 시모는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하여 물정에 거스르지 않았다.
물장에 거스르지 않았다는 말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지만 이 사람은 반역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관이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달아놓은 거죠.
그러니 심온의 처형은 순전히 외척 세력이 될 존재였기 때문에 처형 당한 것이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겠죠.
세종은 이런 일들 때문에 늘 부인에게 미안했을 겁니다.
소원왕후에게 미안했을 거고 소원왕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에게 사사로이 뭔가 부탁을 한다거나 세종을 힘들게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조선의 왕비 중에서는 정말 어느거 하나 입댈 것 없는 최고의 왕비로 내주를 아끼지 않았고 그러니 이 세종 역시도 부인이지만 자신의 부인을 굉장히 대우해 주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록에 따르면 왕후가 나아가고 물러갈 때에는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서 공경하고 예로 대하셨다.
왕비가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늘 일어서서 맞이하고 배웅했다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마음이 살아서도 잘 실록에 나타나고 있지만 죽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 왕릉 중에서는 또 최초로 이 두 부부는 합장 릉에 모셔져 있어요.
그래서 지금의 여주거든요. 여주에 가면 영릉이라는 곳에 부부의 합장릉이 모셔져 있습니다.
여기까지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와 새어머니 신덕왕후와 그리고 자신의 부인이었던 원경왕후 그리고 아들이었던 양녕과 세종과의 대립까지 같이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태종이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잠재해 있는 모든 악몽과 슬픔을 뒤집어 쓰고 갈 것이니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어진 성군이 되어라 우리가 이걸 들여다보면 도대체 태종이 왜 이렇게 주위에 사람들하고 갈등하고 이렇게 했는지 짐작이 되죠.
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 때문이었던 거죠.
세종의 치세를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또 한편 태종이 이런 유언도 남겼다고 합니다.
태종이 돌아가실 즈음에 이게 바로 세종 즉위초였는데 우리가 세종 때는 태평성대였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세종 때 천재 지변이 굉장히 많았어요.
특히 흉년이 굉장히 많이 겹쳤어 그 당시 비가 오지 않아서 나라 전체가 큰 걱정이었는데 태종이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면서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태종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어김없이 음력으로 5월 10일인가 그러는데 지금으로 치면 6월쯤 되겠죠.
그즈이 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을 그 비를요 태종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런 면모를 들여다보면 태종이 이렇게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고 외척 세력을 경계한 거는 조선 왕실을 위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태종의 이런 모습을 들여다보면 태종이 권력에 집착을 했던 것 같고 태종이 권력을 집착한 건 뭐 때문이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텐데요.
태종이 측근들을 많이 제거를 했죠. 특히 외척 세력을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근데 이 외척 세력을 경계한 이유가 뭘 것 같아요.
왕이 했던 일들을 보면요왕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태종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 신다 광후가 이성계에게 굉장한 입김을 작용해서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니 외척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나라를 뒤흔들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외척을 굉장히 경계한 겁니다.
그래서 태종이 외척을 지나치게 경계한 건 새어머니 신도 광우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근데 보통 이 태종처럼 왕자의 난을 거쳐서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사람인 경우에는 특히나 더 자기의 측근을 곁에 두려고 하겠죠.
그럼 그 측근으로 봤을 때는 외청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거든요.
태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외척 세력을 제거를 했다라는 거죠.
그래서 도대체 태종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측근들을 왜 제일 먼저 제거를 했을까 를 들여다보면 태종은 자기 권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권력이 확고한 자신이 없었다면 측근들을 제거할 수 없었겠죠.
그렇게 종합해 본다면 태종은 개인적인 왕권 강화를 위해서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죽고 난 이후에 아들들 그리고 조선 왕조의 탄탄한
미래를 위해서 이렇게 권력에 집착하고 권력에 맞설 만한 외척 세력들을 경계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종에게 권력은 무엇이었을까 태종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권력에 욕심을 냈을까를 태종 일화를 통해서 태종의 권력의 목적이 뭐였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고요 제가 정리한 바로는 태종이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아들 대우의 치세와 조선 왕실을 위한 권력을 지키려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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