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제 이렇게 천왕을 중심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양처럼 바꿔 나가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요.
1871년에 메이지 유신 정부는 정부 수립 3년 만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되는데요.
관료 46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서 미국과 유럽 각국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 사절단이 바로 이아구라 사절단이라는 단체에요.
예 일토 1호붐이 또 있네 그렇죠
안 빠지죠 어 이토 히로부미만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인물들 모두가 다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메이 유신 이후에 정부의 고관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에요.
도모미만 아직 문안을 못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지금 제가 설명 들었을 때 사절단의 명칭을 이아코라 사절단이라고 했잖아요.
이 화구라는 사람이 단장이에요.
옆에는 전부 다 부단장입니다.
일본의 색깔을 가지고 가는 거 그렇죠
아 나는 일본이다 라고 하는 거를 지키고자 했죠.
물론 몇 개월 뒤에 똑같이 머리 자르고 양복을 있습니다.
안 된다라는 걸 알았거든요. 이런 주요 인사들로 구성이 됐던 사절단은 당시 국가 예산의 약 1프로 즉 50만 달러에 해당하는 예산을 가지고 떠나게 돼요.
1%면 엄청 많은 거잖아요.
국가 지금으로 따져도 거의 한 1천억 원 정도의 거액을 가지고 해외로 가게 되는데요.
유학에 엄청 돈을 투자한 거네요. 그렇죠
서양을 한번 진짜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 라고 하는 거에 어떤 투자를 하게 되는 거겠죠.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열두 개 나라를 1년 1개월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럼 백희 씨 이렇게 지금 1천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고 유학을 가게 된 계기가 뭡니까
연치유신 이전에 맺었던 그 그거를 시작으로 한 그 불편등 조약들이 있잖아요 소한나라들하고 맺었던 그거를 어떻게든 개정하고 싶은 거예요.
변등한 걸로 근데 가보니까 전혀 사대를 안 해주는 거야 네 그래서 이 이대로는 안되겠다.
서양 나라들한테 인정받는 나라가 되야 된다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됐는데 특히 뭐 이때 이또 히로부미가 미국에서 한 연설 중에서는 일본이 가장 희망하는 것은 서양의 전점 수준까지 발전하는 것이다.
이런 강한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서양 국가를 향해 가겠다. 그룹에 들어가고 싶다 라고 하는 강한 열망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근데
그때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왜냐면 처음으로 일본은 사람을 다른 나라로 보내니까 어 뭐 은행에 돈 넣으면 된다 뭐 보관도 되고 이유도 된다고 해서 그러면 다 넣었어요.
근데 며칠 뒤에 그 은행이 망했어요.
여기서 돈이 다 날아간 거죠.
네 은행 입장에서 일부러 묻어낸 거 아니에요.
갑자기
천억이 들어오니까 어 뭐야 실제로 그런 음모론도 있습니다.
유학생을 통해서 했다고 하는 그 서양인이 여하가 어떻게 서양 사회가 움직이고 있는가 라고 하는 거에 근본적인 거에 대해서는 아직은 잘 몰랐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래서 이제 사절단은 이제 미국 캘리포니아와 그 다음에 네바다 시카고 워싱턴의 철도를 이제 시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조선소와 제철소 고무공장 등 쉰세 개의 공장을 방문해서 석탄과 철강을 동력으로 하는 공업 정책이 어떠한지를 배우고요 영국제 철도 기관차와 군함 대포 주문도 많이 하게 돼요.
그리고 이제 그 과정에서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연설을 듣고 군사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큰 나라가 되려면 국민들의 애국심을 가지고 국력을 키우는 길 밖에 없다 라고 하는 걸 이제 배우게 되죠.
밖에서 선진 문물과 사상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일본 안에서도 이 선진문물을 통해 강력한 군사국가를 건설해 나가고자 하고 있었어요.
그 시작은 미국에서 왔던 페리가 일본과 조약을 맺으면서 주고 갔던 선물이 하나 있었는데요.
실제 크기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증기 기관차였습니다.
4분의 1밖에 안 되는 증기 기관차를
모형인가
이게 장난감 같은데
그렇죠 정말 좀 작아 보이죠. 사람하고 비교해 보면 그런데 이렇게 사이즈는 작았지만 일본 사람들한테는 엄청나게 충격적이었어요.
이 증기기관차가 왜냐면은 어 우리나라도 가마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이 이동할 때 자기 힘으로 안 가면은 타인의 힘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기계가 지가 스스로 움직이는 거 같아요.
근데 그냥 단순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죠.
증기기관차의 어떠한 그 과학적인 그리고 기술력 이런 거에 매우 놀라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메이지 유신 정부는 과거 막부와 번이 가지고 있던 토지 징수권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거죠.
그거를 정부가 이제 독점을 하게 돼요.
중앙집권이 되니까 독점을 해서 그 돈으로 산업에 투자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메이지 유신 전부터 연구하던 철도산업 연구가 메이지유신 이후에 이제 본격하게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처음.
깔려진 철도가 바로 지금의 도쿄와 요코하마를 잇는 최초의 상업용 철도가 개통이 되고요 그 이후에 고배와 오사카 오사카와 교도를 잇는 철도가 개설이 되게 되면서 개항장과 중심 도시를 연결시켜 나감으로써 운송을
손쉽게 만들게 되는 거죠.
국가가 나서서 인프라를 깔아준 거네요.
이러한 철도 산업의 발전은 광산 개발을 발전시켰고 그리고 더 많은 제철소를 세우게 하게 세우게 만들면서 여기에 방적 조선업 기계공업 등 군사공업에도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백기 씨 그때 만들어진 기업 중에 저희가 알 만한 유명한 기업들이 있나요.
있죠 그 군수산업에 굉장히 큰 역할을 했었던 미추드시 사실 그게 일본의 군국주의의 어떤 뒷받침으로 된 그런 기업이기도 한데
나중에는 제로센 전투기 같이 만드는 그런 기업이 됐고 따로 또 미트리와 같은 그런 재벌들이
그만큼 이런 군수산업 산업의 전신이 됐던 기업들이 이 시기에 다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미집시 같은 경우 처음에 출발점 자체가 정부가 구입했던 우송선을 싼 값에 불화받아서 시작되는 기업이에요.
근데 이제 이렇게 산업을 발전시키는 한편으로는 또 군대 역시 본격적으로 서양의 전문가들을 초빙을 해서 그 기술을 전수받게 됩니다.
특히 이제 매일 주신 이후 영국 해군 교사단의 수장으로 온 인물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일본 병사들에게 그 기관 운용 포술 배를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쳤는데 원양항해 씨씨와
현지의 훈련 등을 하면서 무질서하던 해군 교육 제도를 바꿔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은 점차 전쟁 국가로서의 면모를 착착 밟아가게 되는 거죠.
예 천팔백칠십오 년에 대만을 침공한 지 일 년 불과 일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천팔백칠십오 년 에 일본은 미뤄놨던 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요.
바로 운요라는 군함을 강화도에 보내게 되는 겁니다.
김유호 사건
운요를 그린 그림입니다만 여기에 왼쪽에 까만 배를 보니까 뭐 이렇게 떠오르는 거 없으세요.
미국 위에 둥개가 있고 그렇죠 예 페리 미국의 페리가 끌고 왔던 함선이 여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죠
이거 완전 대자유네
그리고 페리와 똑같이 조선의 통상 교역을 하자고 요구하게 되죠.
거의 상징적으로
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어요. 페리와 좀 달랐던 점이 있습니다.
페리는 무력 시위고 여기는 내리자마자 저렇게 치는 거예요.
정확하게 보셨네요. 지원씨 어 페리와 다르게 무단으로 상륙을 시도했구요.
그거에 대해서 당연히 자기 방어 차원에서 조선군이 포격을 했죠.
일본군한테 근데 그 교전 끝에 결국에 뭐 조선인 서른 다섯 명이 죽고 일본은 그 다음에 좀 물러났었지만은 이걸 빌미로 삼아서 육 개월 뒤에 함대 여섯 척을 끌고 와서 다시 일본 조선한테 요구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력 침공으로 일본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는 거예요.
예 그 내용은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일본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지 못하게 하는 등 뭐 본인들이 당했던 거와 유사하게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똑같이 하는구나
쇼인이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이 주장해왔던 정한론이 결국 광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해서 구체화되고 실현됐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후로도 정안로는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주장하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사진에서 보면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비롯해서 제2대 조선통감 손에 아라스게 제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지 을사의약과 한일 병탄 당시 총리였던 가츠라타로
1894년 경복궁에 난입한 인물이자 아베의 고조부인 오오시마 요시마사 역시 이 정한론에 영향을 받아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아베의 고조부예요. 예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간이 된 거죠.
정안론이라는 게 이렇게 일본은 서양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전쟁 국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전쟁은 이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군극주의 정신이 필요했던 거예요. 국가와 천왕의 목표가 곧 일본 국민 개개인의 목표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본의 궁극주의는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에게도 이제 퍼지게 되는 거죠.
뿌리를 이제 내리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리고 격변기였던 메이지유신 시대를 거쳐서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어 일본 사상의 근간을 만들어서 절정을 달하게 됩니다.
네
결국 대만 침공으로 일차 힘겨루기를 했던 청나라와의 대결은 천팔백구십사 년 조선에서 결판을 내게 됩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로 청일전쟁으로 다시 맞부딪히게 되는 거죠.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의 엄청난 우세였습니다.
특히 해군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어요.
전함의 평균 속도도 훨씬 빨랐고 일본의 속사포에 중국의 전함은 다섯 척이 침을 대거나 대패해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침몰한 배가 중국에 청나라에 비해서 한 척도 없을 정도였죠.
그럼 이게 그럼 그동안 이들이 그 사들인 무기와 전쟁 이런 경험이 합쳐진 결과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네 맞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청일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서양의 무기를 기반으로 강력한 무기를 직접 개발하기까지도 했어요.
자체적으로요 네
1875년에 무라타라고 하는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 스웨덴을 순방을 하면서 한 300장 정도의 소청을 가지고 귀국을 했는데요.
그걸 분해해서 분해하고 이렇게 연구를 한 결과 천팔백팔십 년에 일본 최초의 국내산 즉 자국산 제식 소총인 무라타 소총을 만들게 됩니다.
1880년대부터 1886년까지 약 10만 장 정도가 생산이 되었고요
연발총으로도 만들어져서 청일전쟁에서 일본 육군의 주력 무기로 떠오르게 됩니다.
일본의 압승으로 끝난 이 전쟁으로 배상금과 함께 에 중국의 영토인 나우등반도 그리고 대만 펑섬까지 넘겨받게 됐어요.
특히 청일전쟁을 치른 후 받은 대배상금을 이제 계산해보면 무려 이억 삼천만 양이었습니다.
은으로 이건 당시 일본의 일년 예산의 네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거예요.
전쟁 배상금의 맛을 들인 일본은 이제 국민들까지도 합심해서 정부의 대외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게 됩니다.
독일하고 프랑스의 협조를 얻은 러시아가 일본이 청일전쟁 후 넘겨받은 중국 대륙의 라운딩 반도를 다시 반환하게끔 만들어요.
그러니까 다시 뺏기게 된 거죠.
받았던 걸 다시 뺏기게 되니까 일본 국민들은 이 라우등반도 반환을 주도했던 러시아하고 한 번 전쟁하자 라고 하는 전쟁 론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공건하게 논하는 분위기가 일반인들에게도 퍼지게 됩니다.
러일 전쟁하자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군비를 엄청나게 늘리는데요.
얼마나 늘렸는지 한번 그래프를 보도록 하죠.
우와
지금 전 청일전쟁이 있었던 시기가 이 시깁니다.
근데 럴 전쟁이 있게 되는 이 시기죠
예
재정지출의 80%가 군사비예요.
하하 국가의 모든 전력을 쏟아붓기 시작을 하는 거죠.
총공세는 예 내부에서 전비를 다 감당할 수 없던 일본은 외국 자본까지 도입해서 당시 14억 엔의 빚까지 지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선 뿐 아니라 야전 중포와 공성포는 성능이 우수한 독일에서 해안포는 프랑스에서 들여왔거든요.
가장 좋은 무기를 수입하게 되는 거죠.
결국 천구백사년 일본은 모든 전력을 쏟아 부으며 런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막대한 군 장비를 투입한 러시아와의 전쟁은 얼마 만에 끝이 났을까요.
배웠던 것 같아
그런데 이건 배웠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많은 걸 배워서 너무 많은 걸 배웠죠 이 책을 다시 겠네요.
책을 봐야겠죠. 약 일 년 만에 전 일본의 승리로 드디어 전쟁이 끝납니다.
아 맞아 그래 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계속할 능력과 재정이 뭐 고갈돼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와 회담을 추진하기 시작을 해요.
이 회담에서 일본이 관철해야 될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우선 당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과 영토를 보존 받도록 한다 그리고 전쟁 배상금을 받는 거였어요.
되게 중요한 지점이죠. 타이완 친공부터 해서 돈을 받는다라는 거였습니다.
근데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은 이제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별로 이렇게 알았어 라고 이렇게 양보할 수 있는 그 포기할 수도 있는 거였지만은 어 전쟁 배상금을 준다라는 거는 완전히 무릎을 꿇는다라는 걸 의미하잖아요.
어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했던 사할린 북부 지역을 돌려주는 대신에 되돌려주는 대신에 배상금 12억을 요구했는데 결국에는 그런 타협안도 이제 격렬이 돼요.
경렬이 되고 그러면서 국제 여론마저 좀 이렇게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을 하면서 결국 일본은 전쟁 배상금이 없이 사할린 남부를 받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협상을 마치게 됩니다.
가장 이득이 없는 전쟁이었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죠
그래서 사실 일본 군인은 그렇게 반기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배상금을 얻을 수 없었잖아요.
근데 배상금도 없이 그렇죠 대표가 그 조약을 맺고 돌아왔다 이거에 너무나 분노를 느낀 구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정도였습니다.
도쿄에 있는 그 경찰서라던가 그런 게 경찰서 칠십 프로가 습격당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일본에서 미국인들도 그때 피해를 입었어요.
러시아와 회담을 주선했다는 이유였어요.
그래서 미국인이 길에 이렇게 지나가면서 일본 사람은 그 사람을 향해 테러를 했다고 해요.
이렇듯이 전쟁에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왜 폭동이 일어난 걸까요.
아 실질적으로 가시적인 효과가 없었다라는 거죠.
성과가 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당시 예산의 거의 칠 년치에 해당하는 약 십구억엔 가량의 전비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팔만여 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을 당했거든요.
청일 전쟁하고는 거의 규모가 다른 엄청난 대규모 전쟁이었어요.
어 이러한 어떤 희생의 대가가
고작 이거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없지 않냐 라는 거를 통해서 비난이 이제 등장을 하고 비판이 이제 등장하게 되는 거죠.
일본 국민들 역시 전쟁에 익숙해져 버린 모습이 되는 거죠.
그래서 당시 해외가 바라보는 일본을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요.
한번 보실까요.
이 그림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좀 알겠어요.
아 약간 서구 열강들이 자기네들끼리 뭔가 침략을 하고 재미를 보고 있는데 거기에 약간 일본이 슬쩍 끼려고 하는 그렇죠
이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은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맨 앞에 이 사람 같은 경우는 뭐야 너 누구니 라고 하는 표정이죠.
예 당시 침략 전쟁으로 나라의 영토를 넓히던 제국주의의 클럽에 입장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파라고 풍자하는 사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제국주의 클럽이네요.
그렇죠
예 러 전쟁까지 끝낸 일본은 1910년에 여러분 다 아시듯이 한일 병탄 조약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거죠.
아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페리에 의해서 시작된 불평등 조약을 완전한 평등 조약으로 개정하게 됩니다.
아
이제 다시 동등하게 그렇죠
일본은 이제 더욱더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기 시작을 합니다.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거죠. 영일동맹을 맺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일본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일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라고 하는 거를 선포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 이노의 가오르라고 하는 사람은요 유럽의 대전쟁 즉 일차 세계대전이죠.
유럽의 대전쟁은 그야말로 국내외의 모든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전쟁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게 되죠.
결국 일본은 이 전쟁에 참전해서 그 꿈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유럽 상품을 대신해서 일본 면직물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면서 무역은 압도적으로 이제 수출 초가가 돼요.
또한 일본의 해운업 조선업은 호황을 누리기 시작을 하면서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산업 등 중화학공업의 발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비로소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앞지르기 시작하는 공업 국가가 됩니다.
전쟁으로 돈을 많이 벌었네요.
이득을 많이 봤죠. 1차 세계대전 후 재정 위기를 극복한 일본은 미츠비시 기업 등을 통해서 제로센 특공대 비행기까지 만들어내며 제2차 세계대전에 나서게 되죠.
계양 초기엔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비 확충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방어가 가능해진 이후 19세기 말부터는 대외 팽창 정책을 추구하게 되는 거죠.
그들의 믿음대로 선택한 전쟁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탄생시켰고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약 3백만 명의 자국민과 약 2천만 명의 아시아인이 죽고 한반도와 많은 국가가 희생을 당하게 된 거죠.
천구백사십오 년 패망하면서 매일 주신 이후로 쌓아 올린 전쟁 국가라고 하는 것 전쟁 국가는 이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의 선택으로 맞이한 것은 세계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전에 투입된
핵무기로 인한 참혹한 폐망뿐이었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파이
그리고 1947년에 새로 발표된 일본의 새 헌법에는 일본은 이제 전쟁을 영구히 방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도 포기한다는 조항을 명시하게 돼요.
그럼에도 아직 일본에는 궁극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요.
시간이 흐르고 정세가 변하면서 일본 헌법에 명시된 군대 보유 금지와 교전권 포기 원칙은 이미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미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해상 자위대를 비롯한 일본의 군사력은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태풍의 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거죠.
전쟁에 몰입하며 부국강명을 이루고자 했던 메이지 유신 시대
전쟁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해왔던 일본의 움직임 하나에 특히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남 4명을 죽인 태종 이방원 (0) | 2022.04.18 |
---|---|
이방원의 일대기 피로 세운 왕국 (0) | 2022.04.18 |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0) | 2022.04.13 |
덩샤오핑과 시진핑 (0) | 2022.04.13 |
중국 공산당 시진핑의 집권과정 (0) | 2022.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