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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태양왕 루이 14세와 초상화

by 푸른바다99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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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수많은 왕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통치했던 왕. 
77년의 생애에서 무려 72년 동안 왕의 자리를 지켰던 인물 프랑스의 태양왕의 14세입니다. 
프랑스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며 스스로를 승격화시켰던 루이 14세

그런 그가 특히 집착했던 게 있는데요. 
바로 초상화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700개 이상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는데요. 
개의 기간으로 환산해보면 1년에 10개 이상의 초상화를 그린 겁니다. 
그 많은 초상화 중 의의 14세가 가장 마음에 들어야 했던 한 초상화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루이스 자세가 가장 아꼈던 초상화 그런데 이 초상화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 있습니다. 
루이 14세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숨어 있는 이 그림 오늘 미술 읽어드립니다에서는 이 그림 속에 숨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공만 25개 그 안에 분수가 200여 개

5천 명 가량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들어진 450여 개의 방 여의도 공간의 3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궁전 바로크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건축물 바로 베르사유인데요. 
이 베르사유를 만든 인물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입니다.

그는 20여년간 공을 들여 이 새로운 왕궁 베르사유 궁을 짓습니다. 
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 루이 십사세대만큼 비전을 제시했던 왕이 없는데요. 
루이 14세는 예술가 문인 과학자들에 대한 후원 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는 프랑스의 유명한 테피스트리 공방 고블렌 국립 타피스트리 제작소의 시작도 바로 루이 14세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술가 후원에 힘쓰게 된 이유는 바로 베르사유 때문인데요. 
아름다운 궁전을 짓는 과정에서 훌륭한 장인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장인은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니 자신이 학교를 지어 유능한 조각가 화가 건축가를 직접 양성을 했고 그 중 실력 있는 작가를 데려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게 한 겁니다. 
미술 작가들을 교육시키고 거기에 일자리까지 챙겨주는 꼼꼼한 왕이었던 거죠.

그리고 루이십사세는 미술가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신격화 시키는 작업에 열중합니다. 
그중에 그가 가장 많이 신경 쓴 것이 바로 자신의 초상화였고요 여기서 그의 절대 왕권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초상화는 바로 앞서 소개했던 그 그림입니다. 
루이 14세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초상화인데요.

높이가 2.7m 폭이 1.9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초상화는 루이 14세기 전신보다도 더 크게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지금은 원본이 루브르에 있지만 원래는 베르사이유궁 아폴론 방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 아폴론 방은 루이 14세의 아현실로 사용되었던 방입니다.

이 방이 정중앙에 우리가 봤던 이 그림을 걸어놨을 정도로 그는 이 그림을 아주 사랑했던 거죠. 
14세는 이 초상화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사람들에게 이 그림을 자신과 똑같이 대화라고까지 했는데요. 
그 명령을 들은 사람들은 루이 14세가 방에 없어도 왕을 대하듯이 이 초상화에 존경을 펴야 했고 심지어 이 초상화 앞에서 등을 보이는 것도 왕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그림은 루이 14세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려졌던 그림인데요. 
손자인 앙쥬 공작이 왕의 계승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게 되자 손자에게 선물하기 위해 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스페인에 가야 할 초상화가 왜 베르사 위에 자리 잡게 된 걸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요. 첫째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무이십사사가 너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주기에 조금 아까워서 자기가 가지기로 했다는 설이 있고요

두 번째는 다른 나라 국왕에게 주기에는 그림이 너무 화려하고 폼을 많이 잡잖아요. 
그래서 다른 그림을 그려서 대신 선물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림이 스페인에 간 손자에게 선물해 준 또 다른 그림인데요.

배경과 의상은 다르지만 자세와 표정만은 똑같죠. 
어쨌든 리고가 그린 초상화를 자신이 갖게 된 루이 14세는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 그림을 하나로 만들어 배포까지 합니다.

그리고 작가인 리고에게는 귀족의 자기까지 내리게 됩니다. 
루이십사사가 이 초상화를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한 이유는 뭘까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그림 곳곳에는 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숨어 있습니다.

초상화 속 루이 십사세가 두는 황금 백합꽃 문양이 수도인 남색 계열의 대관식 망토 십이 세기부터 프랑스 왕의 문장에 나타난 남색은 대표적인 프랑스 왕실의 색이었습니다. 
그리고 망토의 수노인 백함 역시 프랑스 왕가의 상징이었죠. 
오른손에는 왕홀 프랑크 보석이 박힌 왕관 특히 그가 허리 옆에 차고 있는 칼은 샤를르마뉴 대제의 것입니다.

그야말로 황제의 검인 것이죠. 이 모두 왕의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장치는 더 많습니다. 루이 14세가 차고 있는 성령 기사단의 목걸이는 프랑스 최고 기사단을 가리키죠 파란색 방석 위에 놓인 정의의 손도 주목해야 하는데요. 
세 개의 손가락은 신성한 삼위일체를 뜻하고 신의 대리인 왕이 신의 뜻을 위임받아 정의를 행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왕권신수설을 뭐 그냥 제대로 보여주는 거죠. 
그 외에도 왕을 둘러싼 묵결치는 휘장 금박을 입힌 바침대 위에 대리석 기둥 화려한 문양의 카펫은 호화로운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밭집 부분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율법의 신 테미스가 장식되어 있고요 여신의 양손에 들린 저울과 칼은 각각 정의의 핵심인 귀경과 정의를 관철하기 위한 힘을 상징하는데요.

왕의 법적 권력을 상징하는 조각품인 것입니다. 
특히 이 기둥은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안전과 권능을 상징하기도 하죠. 
이런 상징물들 외에도 루이 14세의 권력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가 신은 뒤급이 좀 있는 일종의 하이일인데요. 
당시에는 구두의 굽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내가 루이 14세니까 이런 구두를 신을 수 있다.

라는 걸 보여준 겁니다. 또 하일이 붉은색이잖아요. 
당시 이런 지은 붉은색 염료는 비싸서 함부로 쓸 수 없었거든요. 
이것 역시 왕의 부유함과 권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였던 거죠. 
사실 이때 루이 14세는 나이가 60세가 넘어서 얼굴을 보시면 턱선이 이렇게 아래로 좀 나오고 나이가 좀 들어 보이시죠 이거는 그야말로 솔직한 초상화의

가깝게 그렸지만 그래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발레로 다져진 멋진 왕의 다리입니다. 
그는 이러한 멋진 두 다리를 통해서 자기의 굳건한 신체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강한 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이 그림이 당연히 마음에 들었겠죠.

루이 14세의 이 초상화는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표준 군주 초상이 되는데요. 
후대의 루이 15세 루이 16세도 거의 똑같은 포맷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커튼과 기둥이 있는 공간 앞에 서서 머리는 정중앙에서 살짝 위쪽에 자리하고요 코를 들고 칼을 찬 채로 망토를 착 젖히는 이 모습 루이 십사세의 초상화와 정말 비슷하죠. 
그런데 루이 십사세의 초상화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모습과 실제 모습이 상당히 달랐다는 겁니다. 
초상화 뒤에 숨겨진 루이 14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허영의 시장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윌리암 새커리가 1840년에 그린 풍자화인데요.

왼쪽에는 가발 대례복 파이일 등 왕의 의상이 옷고리에 걸려 있는 모습입니다. 
그걸 벗은 왕의 실제 모습은 가운데에 있는 노인인 것이죠. 
하이에서 내려온 작은 키 통홍렬로 인해 이미 머리가 벗겨지고 그림 속 근육질의 다리 대신 앙상한 노인의 다리 루이 십사세의 숨겨진 진짜 모습인 겁니다.

윌리암 세커리는 권력의 허상을 비판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죠 왕의 위엄이라는 것들은 결국 이발사와 의복 디자이너가 만든다 한마디로 왕의 모습은 꾸며진 것이라는 것 24세는 어려서부터 정말 많은 병을 앓았습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의 수준이었는데요. 
천연두
폭력 피부병도 있었죠. 위염 설사 편두통 치통 통풍 신장 결석의 당뇨 등 각종 전염병을 앓으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디저트 프랑스 하면 역시 디저트가 최고인데요. 
디저트 같은 단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탓에 이미 40대 중반에 모든 치아를 뽑아야 할 정도로 치아가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초상화 속 모습과 실제 모습은 좀 달라도 너무 달랐겠죠.

그리고 초상화가 그려진 1701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또 다른 초상화가 있는데요. 
현재까지 제 기준으로 봤을 때 루이 14세의 외모를 실제와 가장 가깝게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왕의 정측면 옆모습을 그린 이 밀랍 초상화가 제작될 당시 왕의 나이는 대략 65세 정도였습니다.

색을 입힌 일랍으로 얼굴을 표현했는데 매우 정교합니다. 
심지어 피부가 움푹 들어간 천연두 흔적까지 그대로 그려내고 있죠 가발도 실제 루이 14세가 쓰던 가발이고요 여기 옷도 아마 그가 진짜 입었던 옷일 겁니다. 
어떠세요. 정말 진짜 같지 않으세요. 
이 밀랍체산화에서는 미고의 초상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왕의 위험은 느껴지지 않고요

지치고 예민한 60대 남성의 피곤함이 드러나 보이죠. 
하지만 정확한 초상화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기대치 또는 그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림 속에 넣어줘야 하는 거죠. 
아마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절대 왕권의 루이 14세를 얘기할 때 지금 본 이런 인간적인 밀랍 초상보다는 리고의 초상화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윌리엄 세커니는 왕의 위엄이란 결국 이발사와 디자이너가 만든다며 권력의 허용을 꼬집었지만 우리 24세는 바로 이 점을 더 냉철히 파악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어도 그걸 가리고 신적인 모습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요소가 중요하다는 걸 루이 14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죠.

루이 14세의 역사적 평가는 냉정합니다.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끊임없는 전쟁과 베르사유 같은 초대형 건축 사업에 너무 재정을 낭비해서 결국 부르봉 왕가의 몰락을 가져온 장본인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죠. 
그런데 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그를 그냥 미워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십자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국산품을 사랑하는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 피아신스 리고의 초상화에서 루이 14세가 입고 나온 옷과 장식은 모두 프랑스제입니다. 
무엇보다도 루이십사제는 프랑스 제품의 품질을 높이려 국립 예술학교를 지으며 인재를 양성하죠. 
오늘날 우리는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작은 의 14세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끄는 화려한 프랑스 명품의 기원도 루이 14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아마 이런 점 때문에 오늘날까지 루이 14세는 늙고 병든 왕이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한 프랑스 왕의 표상으로 여전히 많은 프랑스인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히아신스 리고의 루이십사 대 초상화는 바로 그런 영광의 이미지를 여전히 발산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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