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일본에 당도합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단인 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이 사절단에 포함되었는데요.
수백 명에 달하는 수행원 가운데는 한 화가도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김명국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자 일본의 학자와 문인들은 그의 집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구했죠.
동행했던 통신부사의 일지에는 이러한 기록도 남아 있는데요.
이토록 일본에서 인기를 누렸던 그지만 사실 김명국은 당시 조선에서 평이 좋지 못했습니다.
평민 출신이었고 품행이 단정치 못했기 때문이죠.
그는 항상 취해 있었습니다. 술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정도였죠.
그는 연못을 뜻하는 연담이라는 호가 있었는데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 대신 술에 취한 늙은이라는 뜻의 취용이나 술에 미친 사람이라 하여 주광으로 부를 정도였죠.
또한 그의 작품은 당대 조선에서 유행하던 화풍과는 달랐습니다.
이 그림은 김명국과 같은 시기 유명세를 떨친 이징이라는 화가의 그림인데요.
같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그의 그림은 기존 양반의 그림들처럼 보수적이고 고풍스럽습니다.
하지만 김명국은 달랐죠. 그의 그런 화풍은 조선에선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일본에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나날 동안 일본인들은 그의 집에 들러 극진한 술을 대접하며 그림을 요청했는데요.
그가 술에 잔뜩 취해 그린 작품 중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작품도 있습니다.
바로 달마도죠
부리부리한 눈매의 험상궂은 표정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눈알과 매부리코 아래로 이어지는 덥수룩한 턱수염 달마는 독특한 인상과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림부터 인형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왔는데요.
달마는 사실 인도 불교의 승려였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한 절에 자리 잡는데요.
바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소림사저 쿠무의 탄생지로 유한 그 소림사입니다.
실제로 역사가들은 쿠무가 달마대사의 수련법 중 하나에서 만들어졌다.
보기도 하죠.
달마 대사는 이 소림사에 머무르며 약 9년간 수련을 하는데요.
이때 달마가 했던 것은 면벽 수련입니다.
달마를 그린 그림들을 보면 유독 부리부리하고 크게 그려진 눈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달마가 수행 중에 잠이 몰려오자 눈꺼플을 뜯어버렸다는 설화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눈꺼플을 버린 자리에 풀이 자라자 달마는 이것을 물에 달여 마십니다.
그러자 신기하게 정신이 맑아져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죠.
이를 차의 기원이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후 달마는 9년간의 수련 끝에 득도하게 되는데요.
달마는 경전을 달달 외는 것보다 스스로의 마음과 본성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 이것이 달마가 깨달은 이치였죠.
때문에 달마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참선 수행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스스로를 돌아봐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는 선종불교의 기틀이 되었죠.
달마의 제자들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달마를 그리는 것을 수행의 일부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수행의 목적으로 많은 달마 그림을 남겼는데요.
수많은 달마 그림들을 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달마도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우선 달마의 험상궂은 표정이 할 수 있는데요.
보통 부처와 보살 등 불교 그림들 속 자유로운 표정을 떠올려보면 달마의 표정은 독특합니다.
이러한 달마의 매서운 표정 덕분에 예로부터 달마도는 귀신과 불행을 쫓는 부적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수행자들은 달마의 이 험상궂은 표정 속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읽기도 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자신의 본심을 고민하는 표정 속에서 순고한 깨달음을 보는 것인데요.
수행을 통해 마음의 눈을 뜬 자만이 달마의 매서운 표정 아래 진정한 깨달음을 읽어낼 수 있다 하죠
달마도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 색이 없다는 것과 그려진 종이 대부분의 큰 여백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부터 그려진 달마도는 대게 먹으로 그린 선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흐르듯 그 굵은 선 사이로 달마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 특징이죠.
이는 달마의 정신을 담아내려는 시도인데요.
달마를 그리던 화가들은 달마의 외형이나 모습보다 달마의 정신을 담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사물의 속성인 색깔은 달마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죠.
달마도가 가진 여백 또한 그러한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이는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는 깨달음을 표현하려는 시도죠 달마의 고민하는 표정 위로 텅 빈 여백 속에서 보는 관객들도 생각을 채우게 됩니다.
제자들이 달마도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수행의 일종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수많은 달마 그림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달마의 모습은 이것일 겁니다.
이는 조선의 화가 김명곡이 그린 작품인데요.
단숨에 그린 듯한 분놀림에도 덧칠 하나 없이 호쾌한 느낌으로 달마의 인상을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명국은 실제로 달마도 외에도 다양한 작품 속에서 이처럼 굳세고 거친 붓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버릇과 관계가 있는데요. 김명국은 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죠.
김명국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가 어느 정도까지 취해 있을 때 그림을 그린 것인지 예상해볼 수 있는데요.
김명국은 나귀를 타고 가는 사내를 여러 차례에 걸쳐 그렸습니다.
그가 가장 알맞게 취했을 때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아래쪽의 다리와 나귀 그리고 인물 모두 섬세한 묘사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변 겨울나무들과 산은 자유분방함을 넘어서 축기가 느껴질 정도로 어지럽게 그려졌죠.
이처럼 치밀한 가운데에서도 백기 넘치는 필치의 조화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던 김명국만의 개성이었던 겁니다.
반면 만취 상태로 그린 그림의 예시로는 바로 이 나귀 탄 사람을 들 수 있는데요.
얼핏 보면 얌전한 그림 같지만 나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앞다리와 뒷다리의 움직임이 맞지 않아 어색합니다.
배경도 아무렇게나 휘둘러 처리하는 바람에 인물과 산수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이처럼 술은 김명국에게 창작의 촉매제로 걸작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역효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량에 흡족할 정도로 마시지 않으면 붓을 들지 않았던 탓에 일본인들은 김명국에게 진귀한 술을 대접하며 끊임없이 그림을 부탁했는데요.
달마도 또한 일본 통신사로 건너간 시절 그곳 사람들의 요청에 술을 마시고 그렸던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불교가 융성했던 일본에서 김양곡이 그린 달마도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밑그림 하나 없이 대담하게 그어 내려간 붓놀림에서 달마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신의 경지라 놀라워했죠.
이렇게 최소한의 절제된 선만으로 수정이나 덧칠 없이 그리는 것을 간필법이라 부르는데요.
이건 김명국의 특기이기도 했죠. 호방했던 김명국의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목선으로 그려낸 그림이지만 이 달마도는 담아야 할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달마의 고민을 드러내는 표정과 덧대미 없는 선으로 표현된 순고한 깨달음 그리고 달마 위로 펼쳐진 여백을 통해 달마의 사유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유롭게 펼쳐나간 그의 부선에선 지금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달마의 철학까지 느낄 수 있죠
그러니 김명국의 일필휘지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인들은 달마와 함께 수행했다고 느낀 겁니다.
김명국의 이런 호쾌한 그림 솜씨를 두고 신들린 붙잡이라고 칭송할 만 했죠.
양반이 아니어서 당시 화단의 흐름을 거스르는 개성을 지녀서 조국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 화가 김명국 결국 조국이 아닌 낯선 땅에 도달해서야 그의 절묘한 작품들을 알아봐주고 열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신만의 개성으로 조선 회화의 역사에서도 선명한 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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