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여러분은 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한 700년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 개통 이주민과 압록강 유역 졸본 지방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처럼 다섯 개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각 부가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오부족은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로부 출신의 고 씨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등의 제가들이 있었고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대가들은 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가 회의를 통해 합의로 결정하였는데
회의의 수장을 대대로 또는 망리지라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 취수제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랑이 혼인하여 신부의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지어 생활하다
자식이 장성하면 처 자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대리 사위 제도인 서옥제가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17킬로미터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국동대혈이라는 동굴에서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하 부인을 섬겨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동맹을 열었는데 제천 행사는 하늘의 풍요를 기원하는 동시에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합의 자리였습니다.
고구려가 자리 잡은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역은 산간 지역으로 농토가 적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부족을 약탈해 생계를 유지하는 약탈 경제 활동을 하였고
곡식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에 저장하였습니다.
그러한 탓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 적용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열두 배를 배상하게 하는 일책 시 비법이 있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한 후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 베었고 마찬가지로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시를 비롯하여 오부 출신의 귀족들이 차지하였는데 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고구려는 1세기 초 유리왕 때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은 옥저를 정복하여 청천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현도군을 공격하여 요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계루부 고 씨의 왕위 독점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은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부족적 성격의 오부는 이후 행정적 성격의 오부로 정착되었고 오부의 지배자는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백성들은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지만 생활이 불안정하여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국천왕 때에는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농민 몰락 방지를 위해 진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봄에 국가가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 갚게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는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던 고구려는 3세기 중엽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수 관고검의 침입으로 세력이 위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 세기 초 미천왕은 중국 오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압록강 하류의 서한 평을 점령하면서
중국 대륙과 한 군연인 낙랑군 대방군의 연결고리를 제거하였습니다.
뒤이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한 미천왕은 중국의 군현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할 수 있었고 요동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전연과 대립하였습니다.
하지만 4세기 중엽 고국원왕 때에는 전연 모용황의 침략으로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되며 미천왕릉이 독을 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남쪽에서 올라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내부의 체제 정비를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4세기 후반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고 왕이 곧 부처라는 왕죽불 사상을 내세워 지방 세력을 통합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하였고
윤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윤령이란 형률과 법령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율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형률이며 영은 행정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법령을 말합니다.
소수리망의 이러한 개혁으로 고구려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4세기 말에 즉위한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중국 위징 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정복 활동을 펼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서북쪽으로는 후연과 거란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굴복시켜 요동지방을 포함한 만주 남부 지방과 부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아신왕이 다스리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쳤으며 왜와 우호적인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형 그릇에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광활한 영토 확장의 결과로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을 표현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과 왜군의 격퇴 과정 묘지기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세기에 즉위한 장수왕은 중국이 남조와 북조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자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대부분 평양 천도 이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 교육기관인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한 악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장수왕은 천도 후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계로왕을 죽이고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산만에서 중령 경북 동해안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는데
이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 비는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입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을 확인할 수 있고
신라를 동의 신라의 왕을 매금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장수왕 시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은 백제와 신라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습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백제와 화친하는 등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경계하였습니다.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자 왕은 사백구십사년 부여를 병합하며 부여의 왕과 일족을 고구려에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낮에 동맹을 맺은 신라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고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업적을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5세기에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이르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왕을 태왕이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 고 씨를 비롯한 오부 출신의 귀족들이 정치를 주도하였는데 대대로가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관리를 10여 관 등으로 구분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행정구역은 수도 오부 지방 5부로 나누었고 지방장관으로 욕살 철려근지 등을 두어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는 학문이 발달하고 중앙집권 체제가 발전하면서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찍기 역사서인 유기가 편찬되었는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유기 백 권을 간추려 신집 다섯 권을 편찬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다양한 고분을 만들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돌무지무덤이란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널리 만들어졌으며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장군총이 있습니다.
장군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칠층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둘레돌인 호석이 둘러져 있고 무덤 옆에 딸린 무덤인 배총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후기에 이르러 돌무지무덤 대신 굴식 돌방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는 주로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굴식돌방무덤이란 돌을 이용해 외부에서 이어지는 널길과 널 방을 만들고 방 안에 시체를 넣는 관인 널을 안치한 뒤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강서 대묘 무용총 각저총 등이 있습니다.
이 고분들은 천장의 구조가 점차 모서리를 좁혀가며 쌓아 올리는 방식인 모주림 천장 구조의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현세의 생활이 사후 세계에도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과 함께 껴묻거리를 묻기도 하였고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강서 대묘의 사신도 무용총의 무용도 각저총의 씨름도 등이 있습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준다는 도교의 방위신을 그린 그림으로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자 북쪽은 현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고분 벽화의 사신도에서 보여지듯 삼국 시대에는 불교 뿐 아니라 도교 문화 역시 수용하였는데 이는 주로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성행하였습니다.
도교는 산천 숭배나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불로장생과 현세 구복을 추구하였는데 후에 소개될 연개소문은 불교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왕에게 도교의 수입과 융성을 건의하여 국가 종교의 주도적인 지위에 올려놓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주변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였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동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국 수아 당의 궁중에서는 고구려 악이 연주되었으며 연회에서는 고구려 무용으로 흥을 돋우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서역 개통의 인물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였고 이와 반대로 서역의 궁전 벽화에서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졌습니다.
고구려는 무덤뿐만 아니라 건축도 발달하였는데 장수왕 때 평양에 세운 궁궐인 안학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안악 3호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옥 형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불상 역시 발달하였습니다.
금동연가 칠년명 열의 입상이 가장 대표적인데 불상 뒷면에 명문을 통해 고구려 불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일본에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7세기 초 승려 담증이 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하였고 포류사 금당 벽화를 남겼으며
승려 해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다카마스 고분 벽화가 고구려의 수산리 고분 벽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활발한 영토 확장과 독자적 문화를 꽃 피우며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며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세력을 팽창시키자 동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세기 말인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세력을 확장하며 고구려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 유목 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이에 대응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하면서 6세기 말 이후의 국제 관계는 고구려 백제 왜 돌고래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이 연합하는 동서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변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수 문제는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 복속을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를 거절하였고 오백98년 오히려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습니다.
수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불량미 수송의 중단과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성과 없이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이후 수나라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11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에 수 양제는 또 다시 우중문 등에게 30만 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육백십이 년 평양으로 가는 길목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였고 퇴각하는 수의 군대를 현재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크게 물리쳤는데 이를 가리켜 살수대첩이라 부릅니다.
이후에도 수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무리한 전쟁과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수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은 한동안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은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돌궐을 제압한 후 고구려를 압박하는 등 주변 국가에 대한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선에 천리 장성을 쌓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당의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보장왕을 왕으로 세우고 당과 신라에 대해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고구려의 신라 공격 등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육백사십오 년 대군을 이끌고 침략에 나선 당태종은 랴오허강 일대의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안시성 전투에서 성주와 백성들이 단결하여 당의 공격을 막아내자 당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고구려는 성곽을 이용한 전술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수아 당의 연이은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동안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현재 경남 합천에 위치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김춘추를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신라가 점령한 옛 고구려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동맹을 제의하였습니다.
마침 여러 차례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던 당태종은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다시 공략하고자 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백제 고구려 정벌을 위한 나당 동맹이 성사되었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백제군은 백강 전투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하였고 황산벌에서는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결사대마저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연개소문의 지휘 하에 이를 잘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새 아들이 후계자 계승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벌였고
정권의 구심점이 약해지자 귀족 세력과 지방 세력마저 분열하며 정치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당은 지배층의 내분을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성들을 차례로 무너뜨렸고 결국 육백육십팔 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보장왕이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들은 곳곳에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부흥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고연문은 오골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탄성을 근거지로 고구려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이후 안승이 이끈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에 투항하며 금마저의 보덕국을 세우며 전통을 이어가려 하였습니다.
한편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의 의도를 파악한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의 공세가 거세지고 지도층의 분열이 일어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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