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상식

이승만과 최능진

by 푸른바다99 2022. 6. 8.
반응형


지난 시간에 이승만 vs 안창호 이승만 vs 신채호 이승만 vs 박용만 이승만 vs 김구 등을 짧게 제가 아는 수준에서 말씀드렸고 오늘은 1948년
510 총선 그러니까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회의원을 뽑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 선거에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입후보 함으로 인해서 이승만을 국회의원조차 못 되게 하여 새롭게 만들어질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걸 막으려고 했던
이 체능진난 인물 이야기를 한번 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거 진짜 여러분 강의 끝까지 들으시면 반전의 반전 가보겠습니다. 
최능진 일단 집 안 먼저 보시면 아버지가 채경흠인데 굉장한 지주 집안이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제가 지금 이 가족 관계도를 보여드리는 이유가 뭐냐면 형님 두 분이 독립운동가였습니다. 
3.1운동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사형을 구형받고 특히 둘째 형 최능현 같은 경우는 감옥을 탈출해서 중국으로 가서 임시정부에서 한인애국단에 윤봉길이 상해 홍코 우원의 폭탄을 투척해야 될 그때 폭탄 실험에 직접 참여하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체능진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었고 혹시나 이 이름을 아시는 분들은 지금 굉장히 뜨아 하면서 이 영상을 보실 거라는 생각과 더불어 한번 가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평남 출신인데요. 실제로 이 시기에 평안도는 개와 지식인이 가장 많았고 기독교인이 많았던 동네입니다. 
아무래도 중국과 가깝기 때문에 서구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왔고 당연히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와서
그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신민회가 평안도의 지식인들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단체거든요. 
신민회가 전개되었던 단체다 말이 맞나 하여간 1899년이면 이승만보다는 24살 어립니다. 
숭실중을 졸업하고 중국까지 가서 금능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미국까지 유학을 갔으면 엄청난 엘리트죠 듀크 대학에서 체육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흥사단 여러분
미국에서 1913년에 안창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흥사단 안창호에게 뭔가를 배웠으면 안창호의 사상을 배웠으면 올바르게 갈 수밖에 없죠. 
그리고 돌아와서 평양 숭실전문대학 교수를 합니다. 
여러분 안창호가 국내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이 되고 안창호를 따르던 많은 인물들이 구속된 사건에 구속이 돼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이 되었다는 건 어찌 보면 독립운동가로서 별을 달았다. 
이 표현 별을 달았다는 은어죠 나름 스펙은 갖춰진 거죠. 
여러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합니다. 
여운형이 해방될 걸 미리 알았다가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를 해방되는 그날 1945년 8월 15일 날 만들지요. 
줄여서 건 줄려고 합니다. 그 건준 평남지구의 치안부장을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요.
소련을 앞세우고 들어온 김일성의 공산체제가 싫어서 왜냐하면 찬흥진은 미국에서 공부했던 인물입니다. 
독립운동가지만 민족주의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월람합니다. 
그리고 경무부
수사국장까지 됩니다. 여러분 당시 경무부 수사국장이면 나라 전체 경찰에서 넘버 3 정도 된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제일 위에 조병옥이 있었고 그 바로 위에 장택상 정도 그리고 채흥진이었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경무부 수사국장이고 넘버 3이고 당시 대통령이 될 것 같았던 이승만에게 충성하면 이게 출세와 부와
명예까지는 아니죠. 이게 보장되겠습니다만 최능진 성격에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에요. 
아니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하긴 했지만 북한에서는 칠파 숙청이 대대적으로 가했던 반면에 남한에 내려와 봤더니 칠파가 숙청되기는커녕 과거 친일 경찰들이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해 있더란 말이죠. 
일제강점기 그 유명한 고문 기술자였던 노덕술 같은 친구가 서울시의 수학과장까지 승진해 있으니
분노감이 이루 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합니다. 
일제 주우가 일조 일석의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한국 경찰의 8할 이상이 친일파라면 당시 해방되고 나서 38도선 이남의 경찰들 특히 경찰 간부는 80%가 친일파였어요.
그러면 자신은 사회주의자 좌익을 싫어하지만 한국 백성의 파알 이상은 좌익이 된다. 
그러니까 한국 국민의 파알이 좌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친일파 경찰들의 사표를 받아야 된다라는 주장을 했던 인물이 바로 최능진입니다. 
당시 경찰 넘버 원 조병옥은
함께 수양 동해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서대문 형무소 동기이기도 하지만 조병옥 군 즉 친일 경찰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했던 인물이란 말이죠. 
조병옥과 사이가 멀어지는데 특히 여러분 대구 1일 사건이라고 합니다만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사회주의자들 폭동 한때 대구를 한반도에 모스코바라고도 불렀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이 사건을 진압해야 되는 경찰 입장에서 이제 나중에 조병옥과 대립하게 되는데 무슨 대립을 하게 되냐면
태국 폭동은 비난합니다. 일단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이걸 일단 다 지워볼게요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다. 
국립경찰은 친일 경찰과 부패 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대구 폭동 물론 잘못한 거죠. 그러나 저들이 폭동을 일으킨 데는 친일 경찰에 대한 분노가 있으니 우리가 먼저 자정하자 왜 그렇게 조명과 대립을 합니다. 
48년이 됐습니다.
여러분 그럼 이 사이에 해방 정국이죠. 
해방 정국에서 최흥진은 민족주의자 김구 김규식과 함께합니다. 
여러분 이 승만보다 김구가 한 살 어려요. 
그러면 김구나 김규식보다도 역시 최능진은 20여 살 젊었죠. 
여러분 이때 50세 김구는 거의 73세였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나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에도 좋다라는 사람이고
김구나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남북 협상 운동 북한에 올라가서 김일성 김두봉까지 만나고 온 인물인데 나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다는 건 나만의 단독 선거 1948년 50 총선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김권아 김규식은 애초에 총선에 참여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능진은 나도 통일주의자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 남북한 통합 정부 수립을 하고 싶은 채흥진 입장에서는 저 남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하고 싶어 하고 남한만의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이승만을 내가 정치적으로 막아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혼자 단독 입후보 하려고 했던 동대문구 갑 선거구에 입후보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민주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만 단독 후보가 될 수 없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 독재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독재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다. 
도저히 민주주의가 안 될 거다 울라도 저항해야 된다 이게 흘러간 역사를 보면 결과적으로 최능진이 보았던 이 순간이 정확히 맞았죠. 
그래서 이프볼 하려고 했더니
당시 입후보하려면 유권자 200명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 200명의 추천서를 가지고 입후보 등록을 하러 갔더니 서북청년단 시라소니 패거리들 구우청년단들이 그 200여 명의 추천서를 빼앗아서 도망을 가버립니다. 
너무 억울했던 최능진 쪽에서 오히려 미 군정청에 진 소장에게 항의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미군 정책의 딘 소장 입장에서도 아니 이승만 중심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렇다고 해서 아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아니 어떤 선거구에 후보가 이 후보를 못하게 해서야 되겠냐라고 하면서 이 후보 기간을 늘려줍니다. 
그래서 채흥진이 이 후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 군정청도 여론조사를 해봤더니요.
동대문구의 유권자들이 다 체능진을 찍겠다는 겁니다. 
이게 기록적으로 보면 90%가 찍혔다. 
90%는 좀 제가 봐도 너무한데 그런 주장까지 나오게 되니 이게 미 군정청도 당황했던 거고 왜냐하면 이 승만이 총선에서 떨어져 놓고 어떻게 나라의 대통령이 된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승만의 패거리들이 무슨 장난을 하냐면
채흥진을 지지한다라는 유권자 200여 명의 추천서를 써준 분들 중에 20 몇 명을 회유해가지고 추천서를 포기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끝내 이 후보를 못하게 되고 이 승마는 48년 50총선에 단독 동대문구에 입부하면서 국회의원이 됐고 그
50 총선에 뽑힌 국회의원들을 제헌 국회라고 합니다. 
그들이 7월 17일날 헌법을 제정하니 제헌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지 여러분 당연히 이승만에게 완전히 낙인이 찍혀버립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감히 나를 총선에서 떨어뜨리려고 이쁘고 했던 최흥진을 살려두겠냐고 그럼 왜 동대문구에서는 이렇게 최흥진이 인기가 많았을까요.
친일 경찰들을 모조리 사표를 받으려고 했던 차량 질라는 소문이 돌면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겁니다. 
여러분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했던 사람에게 너 빨갱이지라는 누명을 씌어가지고요 또 구속시켜버립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요 억울하죠.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이 북한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합니다. 
이승만에게 정치적으로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힌
찬흥진을 추록시켜줍니다. 근데 추록이 되기는 했지만 다시 여러분 한국전쟁 때 미군이 참전하고 9 2 8 서울 수복 인천 황작전하고 나서 서울을 다시 되찾잖아요. 
이승만 정권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면 인민군이 풀어줬던 자기는 죽을 수도 있다.
천지 입장에서는 원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월북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아요.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조국 재건의 정적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어떻게든지 재건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북 간의 전쟁은 너무너무 비극이니 이 전쟁 상황을 멈춰야 된다는 그런 주장을 하죠. 
그런데 인민군이 풀어준 최능진은 이승만 정권에서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었죠. 
그래서 사형이 구형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사형을 집행당합니다 가족들조차 사형당했던 걸 모르고 있었고 2년 후에서야 상해형당했던 걸 가족들이 알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유언으로 이런 멘트를 남깁니다. 
정치 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굉장히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민족주의의 독립운동가고 친일 경찰에 대해서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승만의 독재를 예측하고 이승만의 독재를 막으려고 했던 그 비참한 죽은 찬흥진에 대해서 대한민국 대법원이
2016년에 무죄를 확정합니다. 내용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사법 체계가 미처 정착 성숙되지 못했던 혼란기 6.25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사 법원에 의한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인에 대해 재판부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훌륭한 재판관이 계셨네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뒤늦게나마 고인의 무죄를 공적으로 선언하는 이 재심 판결이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인의 인격적 불명예를 복원하고 불행한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승만에 의해 정치적으로 사법 살인을 당했던 최능진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들은요 빨갱이 가족이라고 누명을 쓰고 살았겠죠. 
그런데 그 가족이 바로 체 필립입니다. 
큰 아들이에요. 지금은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다라고 해서 채흥진 묘호 옆에 묻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체플립비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정수장학회 회장이고 박근혜 옆에 딱 붙어 있었던 인물이지
아니 어떻게 체능진 아들이 박근혜 옆에 그렇게 딱 붙어 있을 수 있나 그리고 이 채 필립을 왜 박정희가 아꼈을까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여러분 대구 11 사건으로 조병옥과 대립했을 때 대구 2 11 폭동 당시에
그 사회주의적 폭동을 이끌었던 게 박정희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자신의 형 박상희고 박상희가 이 사건으로 죽었고 그 사회주의자 폭동이긴 하지만 친일 경찰 때문에 기인한 문제다라고 하면서 사건을 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사건을 그래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조금 묻으려고 했던 채흥진에 대해서
박정희는 고마움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박정희가 이렇게 최능진의 아들 채필립을 아꼈고 채필립은 바로 박근혜 옆에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나도 아버지를 그렇게 비운에 보냈는데 박근혜 역시 부모를 그렇게 비참하게 보냈으니 동병상련이 든다라고 하면서 박근혜 옆에 딱 붙어 있었죠. 
말년에는 조금 박근혜랑 좀 시끄러워지기는 했습니다만 중요한 건
이 채필립 씨 아들 즉 채능진의 선자가 지금 조선일보의 유명한 기자입니다. 
한때 집안이 빨갱이로 몰렸고 어렵게 살았던 그 반동으로 인해
채흥진이 정치 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라고까지 이야기했던 이 채능진의 손자가 조선일보에 근무한다는 이 아이러니를 제가 최능진의 가족의 입장이 돼서
실제 그 삶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함부로 재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한 가지 결론 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능진은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이렇게 이승만에 의해 또 한 명의 대한민국 인재가 정치사범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했다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