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수많은 명장이 있지만 모든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단 한 번의 패배는커녕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조선의 이순신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번 영상은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해 영웅을 뛰어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에 오른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 부근 요즘으로 치면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변씨 사이 사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순신 순신의 집안은 덕수 이씨 양반 가문으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하게 됩니다.
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영특했고 활발했는데 특히 전쟁 놀이를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훗날 시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유성룡이었습니다.
성룡은 순신보다 세 살 위의 형이었지만 둘은 평생에 걸친 절친이자 조력자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무명의 무관이던 순신을 선조에게 적극 추천해 임진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하는 데 일조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소년 시절 순신의 가족은 한양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소년 시절의 순신은 우리가 흔히 알던 성웅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참외밭 주인이 참매를 주지 않는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망가뜨려 놓질 않나 맹인인 친구를 속여 그 친구네 집 농작물을 서리하게 하지 않나 지독한 말썽 꾸러기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순신에게 누구보다 지혜롭고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들을 끔찍히 사랑하면서도 가정 교육을 엄하게 했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무한 인사를 하고 멀리 떠나는 아들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라고 격려하며 아들이 마음을 쓸까 봐 조금의 나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였습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점점 철이 들게 된 순신 그러면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유학 등을 공부하며 문간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게 됩니다.
1565년 20살이 된 순시는 보성 군수를 지냈던 방진의 외동딸 방수진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관 출신이었던 장인 방진은 한눈에 순실의 자질을 알아본 것인지 사위에게 무임 말고 무인을 적극 권유하게 됩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전쟁 놀이를 좋아하는 등 타고난 자질이 있었던 순시는 장인의 얘기를 듣고 10년 동안이나 준비해오던 문간 시험을 관두고 22살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습니다.
혼날 순신이 무장으로서는 드물게 난중일기나 여러 편의 시조와 한시를 남길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보인 이유는 바로 10년 가까이 문인으로서 공부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1572년 무예를 연마한 지 7년이 지나 28살이 된 순시는 별과에 응시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리며 화를 쏘는 과목을 시험 보던 중 말이 거꾸로 지는 바람에 순신 역시 말에서 떨어져 왼발을 다치게 됩니다.
급히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발에 묶어 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낙방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4년 후 순시는 32살의 나이로 마침내 무과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무과 합격자 29명 중 순시는 12등을 했는데 당시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체계적으로 김하수를 훈련한 현직 군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반 사과에서 무예를 연마했던 순신으로서는 좋은 결과를 얻은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대부분의 조선 장수들이 무예에만 지중해 유교적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던 것에 비해 순신은 무가의 시험 과목 중 병서강독 시험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습니다.
당시 병사강도 시험관이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잘 알 수 있느냐며 탐복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1576년 12월 순신은 함경도 동구 비보에서 종구품 공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장교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 3년 후엔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발령이 나게 됩니다.
그런데 훈련원 봉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순신의 이름을 알린 작은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순신보다 까마드키 높은 지위에 있던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측근을 특진시키려 하자 그건 원칙에 어긋난 일이라며 순신이 반대를 하고 나섰던 겁니다.
결국 순 씨는 이 일로 찍혔는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충청도 절도사의 공간으로 좌천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일은 원칙을 지키는 강직함의 아이콘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 얼마 후 순신을 파격에 가까운 승진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1580년 7월 순신이 처음으로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 지금의 전남 고흥의 종사품 수군만호로 임명이 된 것입니다.
순신은 워낙 강직하고 대쪽 같은 성품에 또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공과사가 분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질투와 모함도 많이 받고 그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순신이 여진족을 토벌한 공을 세워 조정에서 순신에게 큰 상을 내리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순신의 상관는 순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모함을 했고 결국 포상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순신이 두만강에 있는 눈둔도라는 섬을 지킬 때 여진족이 쳐들어와 우리 군사 10명을 죽이고 농민 160여 명을 잡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순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다시 여진족에 쳐들어가 다리에 화살을 맞아가며 여진족 두목과 적군의 목 3개를 배고 백성들을 60여 명 정도 구출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순신이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묵살되다가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패전으로 간주하고 순신에게 배기종군을 내리게 됩니다.
백의종군이란 말 그대로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른다는 의미로 관직 없이 말단으로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벌을 내린 것 그런데 순 씨는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덕분에 파직이나 좌천이 됐다가도 금세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에 순신은 어린 시절 친구인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됩니다.
이때 광관들은 이순신의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반대했는데 이때까지는 선조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는지 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을 끝까지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47세의 나이에 종6품에서 정 3품으로 고속 승진을 하게 된 순신 이건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유명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로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수가 됩니다.
그렇게 전라 좌수사가 된 순씨는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바로 예감하고 조선의 수근력 강화를 위해 철저히 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나대용이라는 부하를 시켜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을 만들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그러던 1592년 임진년 5월 23일 일본은 700여 척의 백을 끌고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조선의 국토와 민생이 처참히 파괴된 7년 간의 전쟁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단 보름 만에 수도 한양을 함락시키고 선조은 피신길에 오르며 조선은 두 달 만에 멸망 직전의 위기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1592년 6월에 있었던 목포 해전입니다.
경상우수사로 있던 원균의 지원 요청을 받고 목포 앞바다로 가게 된 순시는 정박해 있던 일본의 수군함대 26척을 전멸시키며 임진왜란 최초로 우리 수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후에도 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잇따라 승전보를 거두게 됩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잇따라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와키자카 야스하로가 이끄는 정예 병력 73척을 필두로 쿠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40여 척의 병력이 뒤따르며 거제도 지역 총 공격에 나섰습니다.
1592년 8월 11일 순씨는 엄청난 수의 일본 수군이 움직이고 있음을 파악하고 전라우수사 이혁기와 함께 일본 수군과 싸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엔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도 합류했는데 그렇게 모인 조선의 수군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2척 총 55척이었습니다.
1592년 8월 13일 당포 앞바다에 도착한 순신은 와키자카가 이끄는 일본 수군 73척
견내량에 먼저 들어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일본 수군에게 이길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순신 특히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의 운용이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신은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1592년 8월 14일 순신은 판옥선 대여섯척으로 일본 수군을 공격한 뒤 반격해 오면 한산도 앞바다로 마치 도망치듯 일본 수군을 유인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하객진 전술을 펼치게 됩니다.
하객진이란 하기 날개를 편 모양으로 진을 친다는 뜻으로 거북선이 돌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린 사이 일본 수군을 포위한 판옥선들이 포를 쏘아 순식간에 격파하는 전술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순신 이혁기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적함 47척을 분파하고 12척을 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를 한산도에서 거둔 큰 승리라 하여 한산도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복잡한 함대 운영을 보여준 해저는 역사적으로도 거의 없다고 하는데 지금도 전 세계의 많은 해군사관학교에서 이순신의 전수를 공부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덕분에 일본은 남해안의 재해권을 조선에게 넘겨줘야 했으며 덕분에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주요 곡창지들을 지켜냈습니다.
게다가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조선의 의병 활동에도 더욱 불을 지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후 1593년 9월 이순신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군으로 보면 최고의 자리 삼도 수군통제사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우세로 돌아갔지만 순신과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등장 더불어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인해 점차 일본이 밀리는 형국이 됩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순신만 없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첩자를 보내는 등 온갖 계략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방관계
조정을 속여 조선 조정 스스로가 순신을 제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 조정의 거짓 정보를 흘리게 되고 선조는 순신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순신은 기후와 불리한 여건 등을 보고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출격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고 분노하며 1597년 2월 순신을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했습니다.
그리고 순신의 후임으로 그와 갈등 관계에 있던 원균을 임명했습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압송된 순신은 그동안 나라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한 공로를 인정받기는 커녕 무려 한 달에 걸쳐 혹독한 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무암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 수많은 죄명을 뒤집어 씌워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그러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두 번째로 다시 배기종군을 명령받았습니다.
하지만 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순신의 노모가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던 중 객사를 하고 만 것입니다.
천지 간에 어찌 나와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일찍 죽는 것만 못하이로구나 그때 비통한 심정은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7년 잠시 잠잠했던 일본이 다시 침략하여 정류 재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순신에 이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있던 원균이 그해 7월에 있던 칠천량 해전에서 대참패함으로써
순신이 힘들게 일궈놓은 300여 척의 조선함대와 수군들이 괴멸되고 원균 역시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제서야 상황이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형까지 하려 했던 순신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선조는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했던지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라며 얼버부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순신이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돌아왔을 때
남아있던 조선 수군의 배는 겨우 12척 그러다 보니 선조는 수군을 폐지할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이때 순신은 금신전선 상유십이 전선수가 미신불사직 불감 무아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후 배 한 척을 더 구해 남아 있는 전선과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1597년 10월 25일 순신은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 뛰어들게 됩니다.
133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복귀 소식을 들었지만 13척 가지고는 이순신도 뵐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순신은 수군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름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유를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결의를 다지는 한편 꿀뜰목의 지연과 시간에 따른 조류의 변화를 이용하여 전술을 짰습니다.
그 결과 적한 133척 중 30여 척을 격파시키며 순신 스스로도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순신은 인간계가 아닌 천상계 엄청난 철인일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사실 순신 역시 부상 고문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몸 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특히 계속된 전쟁으로 휴식은 커녕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탓에 난중일기를 보면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혼절해 있었다. 하루에 10여 회 이상 연거푸 토했다는 등 수십 차례가 넘는 아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셋째 아들 이면을 일본군의 보복성 전투에서 잃은 뒤 애끓는 아비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소금 창고에 몰래 숨어 울었다는 내용을 남길 정도로 그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기록은 난중일기였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더욱 혹독했던 순신 작은 일 하나도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고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인지 훈련을 게을리 하는 병사들을 아주 엄격히 다스렸는데 오죽하면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늘 무섭고 엄한 모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순신은 일개 병졸 하나하나에 공을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을 수 있게 해줬으며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명랑해전 때 자신의 공로를 부하 안휘에게 준 것인데 덕분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의 원흉이나 다름없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배에 병사를 싣고 도망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순 씨는 조선의 땅과 백성들을 잔혹하게 짓밟은 일본군을 편안하게 돌아가게 할 수 없다며 1598년 12월 명나라의 수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 노량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순신은 선두에 나서 전투를 지휘하다 그만 적의 유탄에 맞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만 남긴 채 눈을 감게 된 순신
그렇게 조선군은 옷으로 순신의 시신을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가 결국 왜군을 대파했습니다.
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다 끝난 뒤에야 알려졌고 노량 앞바다는 통곡의 울음소리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특히 순신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명나라의 장수 진리는 우리 백성들 못지않게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진리는 이순신을 만나기 전까지 걸핏하면 조선인을 깔보고 하대하기 일쑤였는데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이순신의 능력과 성품에 단단히 반해 절대 자신이 탄 가마가 순신의 마를 앞지르지 못하게 했으며 걸핏하면 순신에게 같이 명나라에 가서 살자고 조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1598년 12월 26일 54세의 나이로 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도 끝이 났습니다.
마치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처럼 순신은 그렇게 눈을 감았습니다.
실제로 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45전 40승을 기록했습니다.
그 나머지 다섯 번도 일본군이 맞서 싸우지 않아 무승부를 한 것으로 순신은 단 한 번도 외군에 패배한 적이 없는 엄청난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643년 인조는 무인 최고의 영예인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이순신에게 내렸습니다.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너무도 완벽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적국이었던 일본에서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탁월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지금까지 세계 해전사에서도 길이 남을 자랑스러운 조선의 명작 불멸의 이순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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