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은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조선 6대 왕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의 능입니다.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은 해주정씨 가문의 선산입니다.
여기에 능이 만들어진 이유는 정수나무는 남편인 단종과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사별하면서 단종에 누인 경예공주의 아들이자
시조카인 정미수를 수양아들로 두면서 정미수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제사도 해주정씨 묘소에서 봉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후 해주정씨의 선산인 사릉에 묻혔고 그래서 사릉 주변에는 지금도 해주정씨 가문의 개인 묘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숙종 24년 정순왕으로 복이 되면서 사릉이라 하고 왕릉 권역을 왕실에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왕릉이 조성되면 인근의 민묘들은 모두 왕릉권을 바깥으로 이장하였으나 이러한 사연으로 혜지정 씨의 묘역은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미숙 노역 등 사릉 인근의 해주정씨 선사는 현재까지 해주정씨 분 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열량 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봉가는 여산으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직 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는데 단종의 결혼을 밀어붙입니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이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여겨 천4백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정수나무는
왕비로 체포됩니다. 단종의 나이 열네 살 정순왕후 나이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일 년 뒤 천4백5십오년 수양대군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경쟁자였던 안평대군도 죽이고 단종을 압박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단종은 15살에 상황이 되었고 정수나무는 16살에 의덕의 전호를 받고 왕대비가 됩니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을 비롯한 지편전 학자들이 단종 보기 운동을 계획하고
모두 사형에 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지지 기반이었던 금성대군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명하게 되었고 정수당군은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납니다.
또한 친정 아버지 송현수도 단종 보기 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지방의 관노가 되었고
후에 살해됩니다 가족들도 모두 노비가 됩니다.
꽃다운 열다섯 나이에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하여 불과 3년을 살고 영월로 단종을 보내는 청계천 다리 위에서 그녀는 그게 64년간의 긴 이별일 줄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청계천에 있는 영덕교는 기왕 가는 단종과 정수나무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부부가 생이별한 지 4개월 만에 단족은 끝내 유배지인 영원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단종의 나이 열일곱 살 정수나무는 열여덟 살입니다.
부근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 씨는 소복을 입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어를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에 명목을 빌었다.
합니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근처에 초암을 짓고 치녀들과 살았습니다.
송 씨는 시녀들이 동양에 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한 세조가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그녀를 가엽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정수나무 동정론이 일자 세조는 신부는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습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입니다.
종업원 뒤쪽 산봉우리에 올라 영어를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다.
합니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석였다.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때 그 바위는 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정수나무는 한많은 인생을 살다가 천오백이십일년 팔십이 살의 나이로 중종 십육 년의 노안으로 사망합니다.
젊은 나이에 비명 행사한 단종과는
대조적으로 녀는 조선 역대 왕비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왕비입니다.
그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1698년 단종의 보기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되어 정순왕후의 묘도 왕릉으로 격상되면서
능호가 사랑으로 전해지는데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한 점을 담아 사릉이라고 능호가 정해졌다.
합니다. 사릉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능 주인인 정순남과 남편이 묻혀 있는 영월 쪽을 바라봐서라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우라도 부부와 함께 이어주자는 뜻에서 1999년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 장릉으로 옮겨 신고 정정송이라 이름 붙여 주었다.
합니다. 지아빈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사셨던 정수나무 그 쓸쓸함과 애통함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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