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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 상식

이집트 수에즈 운하의 역사

by 푸른바다99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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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발명된 지 200년 자동차가 발명된 지 130년 비행기가 발명된 지 120년이 지났습니다. 
운송수단은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우리가 직구하는 해외 상품들 길거리에 수많은 외제차들 발전소에 들어가는 석유 뭘 타고 오나요. 
그렇죠 아직도 배를 타고 옵니다. 자 보시는 것처럼 배는 많이 느려요. 
화물선들의 평균 속력이 시속 40킬로미터 정도니까 화물 기에 비해서 20배 이상 느립니다. 
그런데 잠깐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양은 비교가 안 되죠

 

그래서 아직도 국제 무역의 대부분은 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많이 실을 수 있지만 그만큼 느리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갈 때에는 거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연안을 벗어난 대양 무역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럽인들은 두 가지 빡친 포인트와 마주해야 했는데요. 
인도를 갈 때 중국을 갈 때 삥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여기랑 여기 그냥 뚫어버릴 순 없을까

근데 사실 말이죠.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파나마 지엽과는 다르게 수에즈 지엽을 뚫으려는 도전은 기원전부터 수차례 있어왔습니다.

지금의 수에즈 운하가 위치한 수에즈 지협은 고대로부터 이집트의 영역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집트인들도 이 지역의 운하를 뚫고 싶어 했는데요. 
고대의 기술로는 지금처럼 지엽의 최단 거리를 직선으로 뚫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일강의 지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문화가 거의 완성되어갈 때쯤 이 문화가 완성되면 적들이 요기하게 사용할 것이다 라는 신탁을 받고 바짝 졸아버린 파라오가 공사를 중지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현실이 되는데
페르시아의 왕중왕이었던 다리우스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중지됐던 운하의 공사를 마무리 지켜 신탁이 예견한 대로 요긴하게 써먹은 것이었죠. 
참 아이러니하죠. 자 이렇게 만들어졌던 고대의 수에즈 음화는 기원 후 칠백육십칠년에 아바스 제국의 이대 칼리프였던 알 만수르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기 전까지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다를 반복했습니다.
이후 베네치아인들이나 나폴레옹 등에 의해서 뚫자는 말이 종종 나오긴 했으나 이 지역을 단단히 잡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딱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추진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수에즈 운하의 필요성이 진지하게 재조명된 시기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19세기 말이었죠.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는 그동안 건드리지 못했던 아프리카 내륙 지방까지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미지의 제국 청나라가 아편 전쟁으로 영국에게 떡실신 당하는 장면이 열강들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바람에 가장 먼 동아시아 또한 이들의 경쟁 영역에 들어가게 됐죠. 
또한 이 시기쯤 상용화되기 시작한 증기선은 범선과는 다르게 바람의 영향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현대식 수주 운화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주었습니다. 
현대 수에즈 문화 건설에 뛰어든 국가는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이집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자 프랑스 당국은 이집트 주재 외교관이었던 레셉스를 통해 이집트 태수에게 문화 건설에 대한 특허장을 받아냈습니다. 


1858년 레셉스는 이집트 법인 만국 스웨즈 해양문화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책정된 금액이었던 2억 프랑 중 절반인 1억 프랑은 프랑스 내 민간 투자자들에게 투자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원래 유럽 각국 정부에게 골고루 투자 받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잘 되는 꼴 절대 못 보는 영국이 이 타이밍에 어김없이 트롤 짓을 시작했죠. 
정작 영국 자기네들은 투자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집트와 오스만 중앙 정부를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나머지 국가들이 투자하는 것까지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트롤즈 때문에 실제로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아서 나머지 지분은 이집트 정부가 강제로 떠안게 되었죠.

아무튼 이억 프랑이 어떻게든 조달되긴 했으니 공사는 시작이 됐는데 영국의 방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죠. 
프랑스가 이집트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한다는 여론을 퍼뜨려 반란을 유도하는 등 온갖 졸렬한 방법들을 동원해 프랑스를 괴롭혔습니다. 
자 이런 우여곡절 끝에 1869년 11월 17일 드디어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지중해와 인도양의 통로가 거의 천 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죠.

그런데 막상 영국의 깽판 때문에 공사는 10년간 질질 끌렸고 이집트의 재정 상태는 막장이 된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을 보호해줘야 할 프랑스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털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죠. 
이에 졸린 이집트는 영국의 트롤즈 때문에 억지로 떠안았던 스웨즈 운하 회사 지분 전부를 팔아버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이 지분 전부를 사들여서 최대 주주가 된 나라는 누구였을까요.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이집트 경제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했죠. 
그러던 천팔백칠십구년 이집트 정부에 불만을 품은 민족주의 세력의 반란을 대신 진압해 준다는 정의로운 명목으로 군대까지 주둔시키게 되면서 이집트는 사실상 영국의 속국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게 영국의 설계인 것 같다면 기분 탓입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단물이 다 빠지자 칠십여 년 만에 이집트에서 자진 철수를 하는데요. 
이때도 모든 군대를 철수한 건 아니었고

수에즈 운하의 주둔군만은 끝까지 남겨두는 극한의 역겨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세르였죠. 
영국에 휘둘리는 무능한 이집트 왕정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나세르는 뼛속까지 영국을 증오하던 인물이었는데요. 
집권 직후 아니나 다를까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서방 세력과 소련 사이에서 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수족처럼 부려먹던 이집트가 소련이랑 짝짝쿵 하며 비위를 거스르자 이에 빡 친 서방 세력은 기존에 약속했던 아스완 댐 건설 지원을 취소해 버렸죠. 
그러나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라는 강수로 대응을 하게 됩니다. 
이에 극대노한 영국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이집트를 침공하기에 이르는데요.

이게 적반하장이라고 느껴지신다면 기분 탓입니다. 
무튼 이로부터 시작된 전쟁은 오늘날 제2차 중동전쟁이라고 불리죠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시작됐던 1차 중동전쟁과 같이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원맨쇼로 끝이 났습니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 전체를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했고 수에즈 운하도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그분들이 보기에는 매우 시대착오적이고 오만한 행동이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제국주의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었고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양강 체제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가 아직도 주제 파악 못하고 1차 대전 때처럼 활개 치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털리는 장면이었고 소련 입장에서도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소련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이집트에서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본토의 핵 맛을 보여주겠다. 
라고 으름장을 놨는데요. 미국은 수에즈 운하야 어찌 되든 간에 자기네랑 상의 없이 라떼식 제국주의 마인드로 행동한 영국과 프랑스를 참교육해야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핵 쏴도 안 막아준다고 선언을 해버립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서야 현실을 자각하고 즉각 반스로 냈으며 이스라엘도 이듬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면서 비로소 수웨즈 은화는 온전히 이집트 정부의 소유가 됐죠.

문화 완공과 더불어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도 거의 동시에 개통되면서 이 둘의 절묘한 시너지로 인해 세계 무역 발전은 물론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도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개통되자마자 경제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된 것이었죠. 
수에즈 운하는 운하계의 끝판왕답게 현재는 전 세계 물동량의 8%를 차지할 만큼

여러 국가들이 요긴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연간 3억에서 4억 달러에 달하는 통행료를 지불하는 주요 고객 중 하나죠 현재 수에즈 운하의 통행료는 배 한 척당 25만 달러 정도로 한국 돈으로 약 3억 원이 넘으며 연간 통행료 수입이 이집트 정부 재정의 10%가 넘을 정도로 중요한 국가 산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물동량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통로인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호시탐탐 화물선을 노려 골머리를 앓기도 했는데요. 
2008년 유엔 결의안 이후로
한국도 직접 청해부대를 파견하여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우리 상선을 보호하고 있고 아덴만 여명 작전 이후에는 해적들이 한국 상선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물건도 받아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지나치는 물건 중에 수에즈 운하를 지나온 것들도 아주 많을 테고요 이렇듯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일상과도 뗄려야 뗄 수 없는 수에즈 운화인 만큼 그에 엮인 이런 이야기들도 알고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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