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도시를 정복하며 세계 전쟁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제국 로마 약탈과 패배를 거듭해 작은 도시에서 거대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로마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7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앙에 있는 테베르강의 작은 나라 로마가 건국되었습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던 로물루스가 동생을 죽이고 자신의 이름을 딴 로마를 건곡했다고 하죠.
로마는 처음에는 여느 나라처럼 왕의 지배를 받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똑똑하고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왕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모임이 그 유명한 원로원입니다.
훗날 이들은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는데요.
쉽게 말해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귀족 여러 명이 모여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죠.
시간이 흘러 이제 로마는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더 넓은 땅과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참고로 이 시기에 바로 옆에 있는 마케도니아에서는 이미 알렉산드로스 왕이 20대인 어린 나이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정복하는 패기를 보여줬습니다.
후에는 부하들에 의해 다시 각각의 나라로 분할됩니다.
다시 볼로노로 돌아와 로마는 우선 가까이 있는 남과 북 쪽을 정복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합니다.
이어서 지중해 서쪽을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카르타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는데요.
그 싸움이 바로 포이니 전쟁입니다.
이 두 국가는 세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1차 포이니 전쟁은 바다에서 벌어졌습니다.
시칠리아라는 거대한 섬을 두고 서로 싸우지만 카르타고의 비빌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길러온 로마군이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밀어냅니다.
이들은 카르타고 세력을 쫓아내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획득하고 거대한 섬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버립니다.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의 핫니발이라는 천재 명장이 등장하면서 1차 전쟁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로마로 쳐들어갑니다.
2차 포이니 전쟁의 시작이었죠. 핫이발은 수많은 코끼리와 병력을 직접 거느리고 얼음의 땅 알프스로 향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군대를 이끌고는 넘어본 적이 없는 곳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그는 심각한 눈병에 걸렸고 그 이후로는 오른쪽 눈을 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쪽으로 침입한 핫이알은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격도 오래가지 못하고 로마 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쟁에서 밀리자 카르타군은 또다시 항복을 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로마는 이제 카르타고와 저항할 수 없게 철저히 이들을 몰락시키고자 3차 전쟁을 일으킵니다.
카르타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전쟁이었죠.
카르타고는 여성들마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 만큼 거세게 저항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조가 되어 버리죠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순식간에 이탈리아 반도부터 카르타고 등 지중해 연안까지 무력으로 정복하는 데 성공한 로마는 전쟁으로 노예를 들이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돈 많은 사람들은 이 노예를 이용해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경영합니다.
이것은 훗날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데요.
돈이 많은 사람은 더욱더 돈을 벌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지는 빈부 격차가 발생하면서 사회가 불안해져 간 것입니다.
급기야 스파르타쿠스의 항쟁 같은 노예의 반란도 빈번히 발생합니다.
노예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 해방을 위해 전투를 잘하는 노예 검투사들을 모아 계속해서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수십 명의 검투사들이 모여 스파르타쿠스의 세력은 점점 강해졌고 이내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할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하지만 끝내 이들은 진압당하고 붙잡힌 6천 명의 포로들이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 0으로 공개 처형당하게 되죠.
이후 로마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파로 나뉘어 대립이 일어나면서 더욱더 혼란스러워졌는데 여기서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귀족들이 통치하던 로마의 왕을 탄생시키는 데 기초를 닦은 인물이죠.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입니다.
평민파에 속해 있던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현재의 프랑스 쪽에 위치한 갈리아 지역과 영국의 브리타니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평민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로마 내에서도 귀족과 평민파의 대립이 내전으로까지 번지자 귀족파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폼페이오스는 카이사르의 권력이 점점 세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죠.
하지만 카이사 입장에서는 군대를 해산시키게 될 경우 어차피 자기는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였고 이참에 그냥 판을 뒤집어버리는데요.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시내로 진격해 버립니다.
귀족 세력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기가 패권을 잡겠다는 것이죠.
그가 진격할 때 외친 말이 바로 주사위는 던져졌다입니다.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이러한 여러 공으로 로마 내에서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힙니다.
훗날 그는 조금씩 제국의 기초를 닦아가며 로마의 권력자로 등극하는 데 성공하고 사람들도 그를 카이사르라는 칭어로 붙여 신격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로 폼페이오스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급히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 되는데 그를 쫓아 이집트까지 쫓아온 카이사르는 그곳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매혹되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훗날 카이사르는 자신이 믿던 정치인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죠.
로마의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가 죽자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로마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을 옥타비아누스는 서쪽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로마는 이집트의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하필 동방 지역을 통치하게 된 안토니스 또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매혹되는 바람에 로마를 배신하고 이집트에 가담하게 됩니다.
참고로 레피두스는 얼마 못 가고 제거되어 옥타비아누스가 서방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해전을 벌이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거두게 되죠.
이로써 로마는 또다시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원라운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으로 부여받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공화정 로마는 사실상 황제가 다스리는 재정 시대의 로마로 변모한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에는 칼리굴라와 내로 가던 히데이 폭군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지만 오현재라 불리는 5명의 현명한 황제가 제위를 하면서 로마는 약 100년 동안 최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유능한 인물을 뽑아 제의를 물려주었으며 오현재 시대 동안 용도가 확장되고 비교적 평화를 누립니다.
오연재 시대가 지나가고 말년에 콧모두스가 통치하면서 로마는 점점 기울기 시작합니다.
로마 내에서는 군인들이 서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죽이고를 반복하면서 50년 동안 약 25명의 황제가 바뀌게 되는 혼란기를 거치게 되죠.
정복 전쟁이 잦아지면서 노예 공급도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돈 많은 지주들은 대농장을 경영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 200년에 걸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로마 그리스 등 남쪽으로 계속해서 침략을 해왔고 로마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들을 막아야 했던 것이죠.
한편 게르만족의 침입에 데뷔를 하지 않고 종교 정책에 몰두하던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기 전에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두 아들에 의해 로마는 사실상 각각 분리된 국가처럼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분할 이후 동루만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진 서로마는 갈리아와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포기하여 게르만족 천지가 됩니다.
심지어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훈족이 함께 쳐들어오죠 이후 게르만족의 용명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었고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황제가 아닌 이탈리아 왕을 칭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후에 카롤로스 대제가 로마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 황제의 직이 되긴 하지만 명목상의 로마 제국일 뿐 과거의 로마 제국과는 전혀 다른 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동로마 제국도 여러 적의 공격을 받으며 엄청난 위기를 겪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당시 동로마의 수도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국력을 축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 시작된 것이죠.
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을 바꿉니다.
6세기가 되자 비잔티움 제국을 부흥시킬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등장합니다.
지중해를 둘러싼 대부분의 지역을 확보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건축 유스티니아 뉴스 법전을 만들어 서양 법 체계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도 길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는 이슬람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동서로 페르시아 아바르 슬라브 룸바드 등 계속된 침입으로 영토는 좁혀지고 있었죠.
그렇게 천 년간 격변의 시기를 겪은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결국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트루크족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트루크는 수도 콘스탄티노 폴리스를 이스탄불로 바꾸고 이곳은 현재까지 터키의 도시로 남게 됩니다.
테베르 강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로마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과 아프리카 북부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초거대 제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 제국의 영광도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마천과 사기 (0) | 2022.04.10 |
---|---|
한비의 한비자에 대해 (0) | 2022.04.10 |
제주 43사건 양민대학살의 전말 (0) | 2022.04.06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0) | 2022.04.05 |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나? 광해군의 일대기 (0) | 2022.04.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