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습니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 가볍습니다.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저는 별 볼 일 없는 죽음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궁형을 선택했습니다.
때문에 결코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 끊어지는 고통을 겪고 집에 있으면 뭐하니 정신을 잃은 듯이 있으며 집에 나오면 어디로 갈지 모를 정도입니다.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줄기로 흐른 땀에 옷이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옛 주문왕 서백은 감옥에서 주역을 지었고 공자는 공경 속에서 춘추를 지었으며 손비는 두 다리가 잘리고도 병법을 지었습니다.
저는 130편에 이르는 역사를 쓰고 있었으나 초고도 완성하지 못한 채 형벌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천하를 기록해 후대의 평가를 받는 것이 치욕과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글은 사마천이 친구 이만에게 보내는 편지 글 일부입니다.
방대한 역사를 기록해야 했던 그는 어느 날 사형을 선고받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치욕스러운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궁형은 남성의 성기를 잘라내는 끔찍한 형벌입니다.
고통은 말할 것도 없으며 살아남을 확률도 희박했죠.
살아남는다 해도 불명예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는 대체 왜 형벌을 받았으며 고통을 감내하는 선택을 했을까요.
지금부터 사마천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기원전 145년경 산과 황하를 끼고 있는 용문이라는 곳에서 사마천이 태어납니다.
아버지 사마담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갓 키우며 살았죠.
엄격했던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만 짓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며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이라는 관직에 오르죠.
태사령은 천문 역법 등 기록을 하는 관직이었습니다.
사마천 또한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때 옛
서들을 소리 내어 읽고 안기했죠. 사마천은 학문을 좋아하는 젊은 학자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사마천은 인생에서 총 3번의 답사 여행을 떠납니다.
첫 번째는 20살 때입니다. 중국 동남쪽 전역을 돌아다니며 구원의 유적지 옛 순임금과 우임금의 동굴 유적 공자 한신 유방의 발자취 등 여러 곳을 답사했죠.
그 밖에도 마을에 전해져 오는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사기라는 책을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대략 2년 동안 답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마천은 나이 스물다섯에서 30 사이에 낭중이라는 관직을 얻었습니다.
낭중은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황제는 한무제였습니다. 사마천은 한무제와 생물 연대가 비슷하기도 하며 앞으로 사마천 인생에 많이 얽히게 되죠.
관직 생활을 하며 지내다 35살 때 두 번째 답사 여행을 하게 됩니다.
황명에 따라 서남 지역을 시찰하게 되죠.
지역 소수민족들을 위로하면서 지리 풍속 등 다양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정을 마칠 때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돌아갑니다.
아버지 사마담은 원통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봉선 의식이라는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봉선 의식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 1천 명을 받드는 큰 제사였습니다.
진시황제 이후로는 행한 적이 없었기에 이 의식에 참가하는 것은 큰 행운이었죠.
하지만 사마담은 태사령의 관직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병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로 사마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맙니다.
마침 아들 사마천이 돌아왔고 사마담은 말했습니다.
동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내 운명인가 보구나 우리 선조는 주나라 왕실의 태사였다.
그러나 나는 천하의 역사 기록을 다 하지 못하였구나 너는 반드시 내 뒤를 이어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사마천은 반드시 그리 하겠다고 다짐했죠.
그렇게 아버지 사마담은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사마천은 상중에도 황제 옆에서 수행해야 했습니다.
황제는 봉선의식을 마치고도 주변 각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순행했습니다.
덕분에 각 지역의 황하가 범람하는 등 여러 문제들을 알게 되었죠.
사마천 또한 동행하여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마천의 세 번째 답사 여행입니다.
이때가 36살이었죠.
38살이 되자 사마천은 아버지가 맡았던 관직인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마천은 역법을 바꾸는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황실 도서관의 문헌을 열람할 수 있었죠.
노력 끝에 그는 태초력을 만들어 냅니다.
태음태양역이라고도 하며 이 역법이 기초가 되어 청나라 시대까지 오랜 시간 사용됩니다.
이것은 사마천이 40대에 몰두한 일입니다.
태초력을 만들고 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48살이 되었을 때 사마천은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는 유목 민족인 흉노와 다툼이 잦았습니다 한무제는 흉노를 크게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강력한 존재였죠.
때문에 무죄는 종종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견제했습니다.
이광리라는 장군에게 삼만의 기병을 주어 출병하라 명했죠.
그리고 이흥에게는 보급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실 이흥은 무인으로서 능력이 출중했습니다.
게다가 성품이 좋기로도 유명했죠. 그를 따르는 병사들 또한 충성스러웠습니다.
때문에 이름은 보급을 담당하기보다 직접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제에게 전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죠.
무죄는 지원해 줄 군사가 없다면서 탐탁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자신의 군사 5천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결국 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름이 보여준 기계와 용맹에 무죄와 신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흥의 부대는 출전 후 예상 밖의 흉노와 맞서게 됩니다.
흉노는 병력 3만으로 이흥의 부대를 포위했죠.
하지만 이름은 수천 개의 쇠내로 그들을 겁주고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곧 흉노는 다시 팔만의 기병을 몰아 이흥을 공격했죠.
이흥의 부대는 산 아래로 퇴각하고 숨어버렸습니다.
흉노는 혹시나 복병이 있을까 봐 더 이상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흥의 부대에 있던 한 사람이 흉노에게 투항하면서 밀고를 합니다.
이미 전투력은 바닥 났고 복병도 없다고요
흉노는 다시 공세하기 시작했고 이흥의 군대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고 이흥은 그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흥이 가진 5천의 병사로는 8만 기병을 가진 흉노를 감당할 수 없었죠.
이 소식을 들은 무죄는 분노합니다. 신하들 또한 눈치 보기 바빴죠 조정에서는 이름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습니다.
사마처는 생각했습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름의 용맹을 칭찬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황제의 눈치만 본다고 말이죠.
사마천은 이름과 같이 일한 적이 있지만 결코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품행이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사마천은 이름을 변호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죄가 사마천에게 이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어봤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이흥은 병사 5천으로 세운 공이 대단합니다.
때문에 오히려 그 용맹을 칭찬해야 합니다.
비록 그가 흉노에 투항했지만 훗날 반드시 대갚으러 올 것입니다.
무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칭찬해 공이 있다는 것은 처음에 출전을 허락했던 이광리에게는 공이 없다는 의미였으니까요.
이광리는 무죄 애첩의 오빠였습니다. 그리고 무죄는 사마천을 감옥에 가두었죠.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마천은 황제를 속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옥에 갇힌 사마천은 생각했습니다. 아직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는데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고요 당시 사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막대한 돈을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형을 받는 것이죠. 궁형은 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입니다.
달걀만 잘라내는 궁형도 있지만 여기선 정확히 말해 부형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잘라내는 형 뜻했습니다.
그 부분 전부죠 끔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감염병으로 살아남기조차 힘들었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온갖 치욕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보통은 사형을 면할 돈이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명예로웠죠 사마천은 큰 돈이 없었기에 사형 아니면 궁형
둘 중 하나였습니다. 사마천은 죽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 기록을 완수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있는 형을 있었지만 온갖 모욕과 신체적 고통으로 괴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역사를 지필했죠.
사마천은 50살이 되었을 때 중서령이라는 새 관직을 얻게 됩니다.
태사령보다 높은 관직이었지만 사실 그가 환관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사마천에게 편지가 옵니다. 친구 이만에게 온 편지였죠.
안부나 응원 격려의 메시지였지만 사마천은 자신을 환관 취급하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일 때문에 바빠서 답장을 못 하다가 이만이 무고 사건에 연루돼 곧 사형이 집행된다고 하자 사마천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답장을 보냅니다.
그것이 보이만서라는 글입니다. 바로 영상 처음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글 속에는 사마천이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스러워 했는지 적혀 있죠
사마천은 50대 중반이 되어서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태사령 때부터 초고를 준비해 총 16년이 걸렸죠.
역법을 만들거나 이름의 화를 당해 지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이후 사마천의 생애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언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없죠.
단지 그가 남긴 사기라는 책만이 남아 있습니다.
사마천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은 운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운에게는 사마천이 외조부였죠.
우는 사마천의 사기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입니다.
그때가 전한 말기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기는 태사공서라고 불렸으며 후한 말기에 와서야 사기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기라는 책은 동아시아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수많은 역사서들이 있지만 사기의 방대한 양 그리고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하려 한 점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고대 역사를 파헤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거기다 사마천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낀 바도 서술되어 있어 작품으로서도 꽤 재미있게 읽히는 역사서입니다.
특히 사기 열전 부분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
모습이 담겨 있어 인기가 많습니다. 특히 열전 마지막 장 사마천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태사공 자선은 사기를 읽기 전 먼저 참고해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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