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 크고 올바르며 힘찬 기운을 말합니다.
딱 여기에 어울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위풍당당했으며 자신의 뜻을 절대 굽히지 않았죠.
아무리 세상이 난세였어도 말이죠. 천하의 질서는 온데간데 없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양육강식의 시대 그는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선한 마음과 마땅히 가져야 할 의로움으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이죠.
이번에 알아볼 그는 바로 맹자입니다.
맹자는 맹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름은 맹가입니다.
그는 전국 시대 노나라 출신이며 기원전 372년부터 기원전 2080 9년까지 살았다고 합니다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단지 추정되는 수치일 뿐입니다.
맹자는 생물 연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 그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추론을 할 뿐이죠.
맹자의 출신 또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의 성씨가 맹시였기 때문에 공자를 괴롭히던 가문 중 하나인 삼환의 맹손씨 가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반면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만큼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죠.
이야기인 즉 맹자가 아주 어렸을 때 묘지 근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맹자는 제사 지내고 곡소리 내는 것을 따라 했죠.
맹자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장 쪽으로 이사를 갑니다.
북적이는 환경 속에서 맹자는 시장 상인들을 흉내냈죠.
결국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쪽으로 이사를 한 번 더 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글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환경에 따라 성장을 달리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약 2천 년 전 연려전이란 책에서 나왔습니다.
이야기 속의 맹모가 맹자의 어머니가 맞는지와 이 책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논란거리가 있습니다.
사실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맹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키고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의 나이가 4050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먼저 위나라로 갑니다.
맹자라는 책 첫 편부터 위나라 왕인 양해왕 편이 나오는 것이 그 이유죠 당시는 어지러운 난세였고 어떤 나라든지 부국강병을 원했습니다.
나라의 왕들은 인재들을 등용해 그들이 군사 부리는 법이라든가 재물이 많아지게 하는 방법 등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이런 기대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덕을 베푸는 왕도를 행해야만 천하를 쥘 수 있다는 이야기죠
당장의 내일이라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덕을 베푸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맹자는 어디에서도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맹자는 당시 대접을 꽤 잘 받았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겠죠.
게다가 맹자는 그럴 듯한 논리적인 화술로 왕들을 납득시키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그의 이상적인 사상이었죠.
자꾸 덕을 베풀려고 하니 왕은 탐탁치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법을 다루는 병가와 평화를 주장하며 방어 전쟁을 했던 무가 나 자신만을 위한 양주의 도가 등등이 세상을 가득 메웠습니다.
유가는 그야말로 참밥 신세였죠. 당시 사람들도 육아는 옛날 이야기만 하는 고리타분한 사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럼에도 맹자는 그 길이 옳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공자의 신념을 계승했다고 자부했죠.
그렇게 위나라에 있던 맹자는 차츰 홀대를 받기 시작해 제 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제 나라는 당시 엄청 큰 나라였습니다.
특히 제자백가들을 양성하는 학관이 따로 있어 수많은 인재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죠.
당시엔 이들을 직문학사라고 불렀는데 맹자 또한 직문학사 인원 중 한 명으로 들어갔습니다.
맹자는 이곳에서 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78년이라는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대접도 좋았을 뿐더러 학문을 다듬기도 좋았죠.
오랜 기간 제 나라에 머물러 있던 맹자는 왕과의 트러블이 생겨 결국
다시 떠나게 됩니다. 이후로 송나라 설나라를 거쳐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죠 고향에 돌아온 그는 남은 여생을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맹자를 편찬하는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약 80여 세로 생을 마감하죠.
맹자의 일생은 공자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공자도 뜻을 펼치기 위해 50대에 주유천하를 하였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죠.
다른 점이라면 공자는 유세할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했고 맹자는 그래도 대접은 잘 받았다는 정도가 차이겠네요.
그럼에도 맹자는 자신과 제자들이 받은 후한 대접이 전혀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천하를 쥐어줄 수 있는 열쇠를 가졌는데 이 정도의 대접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이런 맹자의 위풍당당한 태도는 맹자의 책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이제 맹자라는 책에서 그의 사상을 들여다보죠 맹자는 유가학파로서 공자와 함께 공맹사상이라고도 불립니다.
공자가 인과 예의 사상을 설파했다면 맹자는 이를 보완하여 인의 예지를 내세웠습니다.
공자가 큰 사상의 틀을 잡았다면 맹자는 이걸 정리하고 다듬었다고 볼 수 있죠 맹자 스스로는 물론 후대에도 공자의 뒤를 를 잇는 아성으로 불립니다.
공자와 결이 다르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자칫 깊어질 수 있는 내용이니 간단하게만 그 이유를 말해보자면 공자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맹자는 명확하게 본성은 선한 것이라 단정 짓는 것이 이 때문에 과연 공자를 순수하게 계승했는가에 대한 이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맹자는 공자를 이었다는 평이 대부분입니다.
맹자는 어떤 사상을 펼쳤을까요. 맹자라는 책은 총 7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힘찬 문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문에 한문을 배우는 이들이라면 맹자를 필수 과목으로 배우죠 맹자 본인이 직접 저술했다고 하나 제자들도 같이 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 사상의 중요한 요점인 성선설 사단 왕도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서로가 이어지는 내용이긴 하지만요 먼저 성선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성선설은 제자백가 중 맹자가 거의 유일무이하게 내세운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난세 속에 사람들은 잔혹의 끝을 보여주었기에 사실 본성은 악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본성론도 이때 나오기 시작합니다.
성선설 성악설이 한가한 철학적 주제일 것 같지만 이 당시에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본성이 뭔지 알아야 그에 맞는 제도를 갖출 수 있으니까요.
다른 제자백가들이 본성에 대해 의심할 때 맹자는 본성이 선한 것이라 단호하게 외칩니다.
맹자 책의 고자 편에 그 내용이 적혀
고자는 제자백가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본성의 선악은 없다고 주장했죠.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나중에 만들어질 뿐 본성 자체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저작은 물론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맹자 책에서만 고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맹자와 고자는 서로 본성에 대해 논쟁합니다.
먼저 고자가 말합니다. 본성은 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터지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지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물이 동서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본성 또한 선악의 구분이 없는 것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물에 동서의 구분은 없지만 위 아래의 구분은 있지요.
사람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물을 튀겨 위로 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본성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맹자와 고자와의 대화는 항상 맹자의 답변으로 끝납니다.
때문에 우리는 맹자의 책이 그와 제자들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죠.
이렇듯 맹자는 성선설의 입장에서 성악설과 싸운 게 아닌 고자의 성무 성악설 즉 선도 악도 아니라는 사상가와 대립했습니다.
맹자는 본성은 선한 것이며 이를 뒷받침할 근거를 하나 이야기합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려는 바로 그 선한 본성 어떤 이익 계산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구하려는 그 마음이 근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맹자는 그 선한 마음을 발현시키는 방법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로 사단 즉 인의예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인의예지는 맹자의 핵심 사상입니다.
먼저 이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 측은지심을 말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 의는 앞에 인을 사회적으로 넓히 개념입니다.
의로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수호지심을 말합니다.
예는 겸손하여 사양할 줄 알거나 양보하는 사양지심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지을 뜻합니다.
맹자가 정리한 이 네 가지 사상은 앞서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원리로 제시됩니다.
이 개념은 후대의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줍니다.
유학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인성론 수양론이 되었던 것이죠.
맹자가 유교에서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이유입니다.
물론 맹자가 죽고 대략 1400년 후에 이야기지만요 맹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죠.
인의를 져버린 자는 잠적한 자로서 하 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왕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죠.
다음 이야기할 사상은 왕도입니다. 세 번째로 왕도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왕이라면 마땅히 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 왕도인 것이죠.
반대로 힘으로써 다스리는 것을 패도라고 합니다.
때문에 왕도를 주장한 맹자는 왕에게 덕치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왕이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신하가 왕을 시해할 수 있습니까 다 그렇다면 오래 전 왕을 패하고 세운 나라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습니다.
인의를 져버린 잠적한 자를 해친 것은 들었어도 왕을 패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
됐습니다. 말인 즉 왕이 인의를 져버리면 왕이 아니라 잔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죠 인희를 저버린 잔적한 자는 마땅히 끌어내려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을 왕 앞에서 당당하게 했죠.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입니다.
바로 맹자의 역성혁명론인 것이죠. 이게 문제가 되어 맹자 책이 후대의 금서가 되는 일이 종종 생겼습니다.
역성혁명을 좋아하는 왕은 없을 테니까요.
또한 왕도는 덕치주의를 의미하기 때문에 맹자는 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왕이 제일 가볍다.
이렇게 힘이 아닌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것을 주장했죠.
그것이 바로 맹자의 왕도사상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이 맹자의 핵심 사상이며 다소 이상적인 내용 때문에 그 당시 왕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습니다.
때문에 유가사상은 한동안 비주류 학문으로 묻혀 있다가 한 나라 때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공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유학은 처음엔 맹자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수많은 제자백가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죠.
사마천의 사기에도 공자에 대한 기록은 상세한 반면 맹자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맹자는 나중에 당나라 때 와서 조금씩 연구되더니 12세기 송나라 때 주자에 의해 유교의 큰 자리를 맡게 됩니다.
유교 경전의 사서에 포함이 된 것이죠.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이렇게 네 가지를 사서라고 부릅니다.
과거를 치르는 유학자라면 필수로 익혀야 하는 과목이었죠.
이때부터 맹자는 공자의 뒤를 잇는 아성이라 불렸습니다.
맹자라는 책은 동양 고전을 접할 때 거쳐가면 반드시 도움이 될 책입니다.
그 문장이 논리적일 뿐더 다른 제자백가들의 이야기와러 수많은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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