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러분 지금부터는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바야로 이제 팔대 현종 때죠 사실 이제 이 앞에 6대 성종 때 우리는 거란의 침략을 겪게 돼서 이때 뭡니까 서희의 활약으로 큰 전란 없이 외교적인 해법으로 이제 어 마무리가 됩니다.
이때 이제 우리는 강동 육지를 오히려 어 확보하는 실익을 얻게 되죠.
나중에 이제 거라는 이걸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강동육주를 돌려받고 싶은데 마땅히 어떤 명분이나 핑계거리가 없는 거죠.
이때 마침 고려에서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강조라고 하는 장군이 어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이런 사건이 벌어져요.
이건 이제 우리가 역사에서는 강조의 정변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자 이게 이제 거란 입장에서는 고려를 침략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긴 거죠.
이때 거란 황제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양규 장군이 흥화진에서 나름 뭡니까 분전을 했지만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조가 이게 작전을 잘못 짜는 바람에 크게 패하게 됩니다.
강조가 패하는 바람에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 당하는 아주 큰 위기를 겪게 되죠.
결국 좀 창피한 얘기지만 우리 고려는 거란에게 싹싹 빌게 됩니다.
어 고려 왕이
그러한 황제를 적당한 시점에 찾아뵙고 조공을 하겠다.
그다음에 강동육주를 돌려주겠다 라고 약속을 하자 거란군이 물러가게 되죠.
이게 이제 거란의 이차 진입이 되겠습니다.
자 근데 우리 고려는 어 강동육주를 돌려주지도 않았고
그다음에 고려왕이 거란 황제에게 직접 조공하겠다는 것도 이 핑계 핑계 되면서 하지 않았죠.
그러자 이제 거란이 1018년에 1018년에 이제 고려를 다시 침범을 침입을 하게 됩니다.
이때는 소배압 장군이 10만 명의 거란 정예병을 이끌고 이제 우리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 고려군 총사령관은 누구냐 바로 이분이 강감찬 장군이죠.
나이 당시 70세입니다. 사실 1차와 2차 침입 때와는 달리 우리 고려는 3차 침입 때는 나름 준비를 굉장히 잘했습니다.
이미 흥화진에서 거란군에게 타격을 입힌 바가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거란군이 끝까지 이제 꾸역꾸역 개경 외곽에 신은년까지 진출했지만 사실 이때도 우리 고려군이 또 거란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당시 이제 한겨울이라 식량도 확보하기 어렵고 그러자 이제 거란군은 사실 퇴각 철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자 사기가 떨어진 채로 철수하는 이 거란군을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이 크게 또 격파를 합니다.
역사는 이걸 기주대첩이라고 합니다. 자 나중에 거란과 우리 고려 사이에는 외교적으로 이제 평화관계가 확립이 되죠.
이건 우리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기 때문에 이런 평화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겁니다.
또 강감찬 장군의 건의로
또다시 있을 수 있는 전란에 대비해서 수도인 개경 주변의 나성을 축조하게 되고요 그다음에 이제 저기 국경 일대에는 이렇게 천리장성을 축조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제 강감찬 장군은 벼슬이 문화시중의 벼슬에까지 올라가게 되고요 84세에 사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제 서울대 기숙사에서 이제 내려오다 보면 낙성대라고 하는 곳이 나오죠 이 낙성대는 바로 이제 별이 떨어진 자리다 사실 이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생가터가 바로 낙성대입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위기에서 고려를 구한 고려 최고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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