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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식

박정희와 김형욱

by 푸른바다99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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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역 tv입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박정희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박정희 정권의 가장 실세인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가장 오랫동안 이 중정부장을 역임한 박정희를 노렸던 스나이퍼 김형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형욱은 황해도 신천군 이북 출신으로 해방 이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 생도로 입학하여 후에 임관하였고 그는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진급하게 되는데 육군 중령으로서 516 군사정변의 주체로 활약하게 되고 불과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회의 최고위원이 됩니다. 
그는 1963년 7월 중정부장으로 올라서 69년 10월까지 중정부장을 역임하게 되는데요. 
이는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가장 오랫동안 중정 부장직을 맡은 케이스입니다.

그는 63년 김종필 초대 부장과 박정희 혁명정부의 최고의 실세들이라 할 수 있는 8기 동기들이 그를 밀어주어 중정부장에 오를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전임 중정부장인 김재춘은 육사 5기 출신으로 김형욱이 후임 중정부장이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동기인 김영욱이 중정부장이 됨으로써 김종필도 힘을 얻고 64 5기들을 견제하던 유일한 세력인 팔기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고 자신에게 보복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러나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김형욱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합니다. 
이 당시 각 부처나 육사 기수들 간에 보이지 않는 파워게임은 분명하게 존재했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주시했습니다. 
김형욱은 이런 일화들로 전임 중정부장 김재춘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의 회고록에서는 김재춘은 박병관 장군의 운전사 출신이라고 글을 비하하는 듯한 글을 써놓기도 했죠.

김형욱은 야심과 권력욕이 굉장한 사람으로 그는 육사 8기의 핵심인 김종필 라인의 사람이었지만 중정부장으로 권력을 움켜쥐게 되자 김종필의 입김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일명 jp 라인으로 통하는 감찰실장 박승곤과 제2국장 윤일균 등을 해임하고 중정을 독자적인 자신의 라인으로 채우고 중앙정보부를 스스로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단 중앙정보부란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에서 따온 한국형 cia라 할 수 있는데 cia는 국가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 조정하는 기구로 수집된 첩보와 정보를 조사하고 분석하며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기관입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합중국과는 다르게 당시 박정희의 혁명정부는 막 출범한 시기로 그들의 세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이들을 막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북한의 위협에도 대처를 해야 하는 막중한 기관이라 cia와 같이 정보 첩보의 모든 권한과 함께 수사권과 각 정부 부처의 조정 감독권까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조직이었습니다.

이는 정보기관인 cia와 미 연방수사국 fbi의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권력기구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이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책은 그야말로 혁명 정부와 박정희 정권의 실세 중 실세이고 핵심 요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4년 8월 김용욱의 정보부는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는데요. 
이는 교수 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사건이었습니다.

중정은 발표하기를 인민혁명당이라는 비밀 조직이 국계의 지령을 받고 정부 전복을 기도할 목적으로 각계 인사를 포섭 확장하려다 발각되어 체포했다는 내용인데요. 
서울지검 공안부에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검사는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불기소 의견을 내었지만 김영욱은 이에 기소할 것에 대해 압력을 넣자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검사는 사표를 내게 됩니다. 
이후 후임 검사들에 의해 기소된 인혁단 관련자들은 공소 취하를 하고 공소장을 변경하는 등

말이 되지 않는 재판 끝에 1심에서 2명만 유죄 판결을 받고 나머지는 전원 무죄 판결이 나는 등 중앙정보부의 허점과 공안 검사가 사표를 내는가 하면 검찰의 고문 파문 등이 일어나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김형욱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것이 무리하고 증거가 없는 수사와 사건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김형욱은 훗날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문제가 된 차지철을 능가하는 다혈질의 불도저 사나이로 유명한데

그는 권력을 쥔 순간부터 이를 확실하게 휘둘러 자신의 지위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끝없이 견제하고 박정희 정권의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자들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아 말 그대로 박정희 정권의 악역을 도맡아 하게 됩니다. 
그는 심지어 같은 육사 동기이며 그를 중정부장으로 밀어준 김종필조차도 도청을 하는가 하면 가택 수색까지 실시합니다. 
오죽하면 당시 김형욱의 별명은 남산 멧돼지 돈가스였고 후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김형욱의 장점을 저돌적인 추진력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습니다.

여담으로 이에 필적하는 다열질 사나이 열 받으면 일단 권총을 들어 위협해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도 있습니다. 
또 김형욱 밑에서 중정 감찰실장을 지낸 방준모 씨는 교포신문에서 196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 예상이 확실하지 않게 되자 김형욱이 방으로 직접 불러 만약 개표를 해서 윤보선 당선 쪽으로 기운다면 그를 총으로 쏘게 라고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방준모는 지시를 따라서 서울 안국동 윤보선 후보의 집이 내려다 보이는 덕성여고 2층에 저격수 1명을 배치하고 대기하였으나 예상 1호 박정희가 116만 표 차이로 낙승함으로써 그냥 철수했다는 증언을 털어놓았죠. 
김형욱은 많은 이들에게 아나무인 격으로 권력을 휘둘렀지만 박정희에게만은 끝없는 충성을 바쳤습니다. 
사실 이는 박정희 특유의 사람을 부리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실력자들 간의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어떤 때는 어떤 사람을 키우고

또다시 자르고 다수의 권력이 서로 충성을 겨루고 싸우도록 긴장을 유도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그의 용인술적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김형욱은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박정희의 용인 수를 잘 파악한 인물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여러 권력 실세들 간의 파워게임에서 무조건 이겨 박정희의 총회를 지속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원성이 자자했고 적도 굉장히 많았죠.

그러나 중정 부장직에 앉아 있는 그는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김형욱의 성격을 잘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65년 9월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중태 씨는 중정부장 김형욱을 만나게 되는데 김중태 씨는 대구 출신이며 경북고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김형욱은 너는 경상도 놈인데 왜 경상도 대통령을 반대하냐 라고 소리쳤고 이에 발끈한 김중태 씨는 김형욱의 고향이 황해도인 것을 빗대어 당신은 이북 사람인데 거기 눌러 앉아서 김일성이나 지지하지 뭐 하러 내려왔어라는 허리케인 조를 능가하는 카운터성 발언을 했는데 상남자 김형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사와 중정의 부하들까지 다 보는 앞에서 냅다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어 깜짝 놀란 부하들이 달려들어 간신히 말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을 폭행하기도 하고 중정의 여러 가지 만행을 주도하였고 심지어 훗날 그의 후임 김계원이 중정부장으로 임명될 때 박정희가 김계원에게 김용욱처럼 패고 다닐 필요 없어 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하죠. 
김형욱은 자신의 중정부장 임기 후반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위해 총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는 박정희를 당선시키기 위해 충실한 악역을 맡게 되는데요. 
1969년 1월 7일 공화당 의장설이 윤치형은 3선 개헌 검토 중이라고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 선언은 일파만파 큰 논란을 만들게 됩니다. 
심지어 같은 공화당 내에 김종필 계열 의원을 필두로 40명의 의원들이 당의 입장에 대해 항명을 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1969년 6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의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은 김영욱 정보부장의 개헌 주도 행위를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김형욱은 우리나라의 암적 존재입니다.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 엉뚱한 것을 잡고 있는 중앙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대통령에게 건의해야 합니다라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1969년 6월 19일 저녁 김영삼 의원은 서울 상도동 자택 입구에서 3명의 청년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합니다. 
김영삼은 차에서 내리지 않아 초산병에 맞지 않았지만

차체에 페인트 칠이 녹아내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정보부의 소행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 테러는 정보부와 김형욱이 벌인 음모라고 주장했습니다. 
김형욱은 물론 이를 부인했고 오히려 김영삼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죠. 
박정희의 3선 개헌 과정은 굉장히 험난했습니다. 
야당은 물론이고 종교계와 대학생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서 반대 시위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3선 개헌안은 통과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급격하게 여론이 나빠지자 박정희 정권은 연장되었지만 개헌을 위해 온갖 공작을 하고 충성하던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우락 대통령 비서실장을 잘라버린 것이었습니다. 
김형욱은 개헌의 과정에서 야당과 국민에 대해 온갖 비난을 받고 있던 터라 새로운 박정희 시대를 위해 그를 계속 데리고 가기에는 박정희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김형욱은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라고 쓰기도 했죠.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권력의 핵심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권세는 이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후임으로 육참총장을 역임한 김계원이 새로운 중정부장으로 임명됩니다. 
김영욱은 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비밀리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 자금을 대기도 하는데요. 
야당을 철저하게 핍박했던 그가 김대중에게 붙은 것은 자신을 버린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김대중의 끈을 잡아야 야당의 보복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기회주의적 처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실 중정부장으로 재임 중 엄청난 월권과 횡포로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원성을 듣고 있는 처지라 중정부장에서 물러난 70년대 초 갖은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73년 3월 유신 후 발표된 유정의 명단에서 자신이 빠지게 되자 박정희가 결국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 직후 73년 4월 서울을 빠져나가 대만으로 떠났고 박정희에게 말도 하지 않고 가재도구와 심지어 애완견까지 데리고 몰래 떠납니다. 
그의 가족들 역시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몰래 떠나게 됩니다. 
김형욱은 대만에서 바로 미국으로 떠나게 되고 이후 돌아오지 않습니다. 
1976년까지 조용히 살던 그는 1977년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미국 사회 표면에 등장하게 되자 김형욱은 박정희에 대한 원망이 폭발해

한국의 로비와 박정희 정권들의 부정부패와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했던 일 등을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유신 정권의 배경 사건들을 폭로하게 되는데요. 
이후 나온 것이 바로 프레이저 보고서입니다. 
대노한 박정희는 그의 배신에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럴 수가 있나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전해지는 바로는 이미 김영욱은 2천만 달러 이상의 금액을 미국 도피 자금으로 빼돌려 놓은 정황이 나오기도 했죠.

그는 2일 이후 또다시 박정희 정권 타도를 겨냥한 회고록 집필에 들어가게 됩니다. 
김형욱은 박정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로 여러 가지 회유와 귀국을 유도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의 회고록에 거액의 원고루를 주겠다는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 윤일균에게 속아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되는데 그 직후 그는 그곳에서 영원히 행방불명됩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썰들이 존재하는데 심지어 한국으로 끌려와 박정희가 직접 총으로 쏴 죽였다는 설도 있고 폐차장으로 끌려가 이건 너무 끔찍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프랑스에서 직접 암살했다는 썰도 있습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프랑스행 이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온갖 권세를 누리던 김형욱은 이 지구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의 시신조차도 찾을 수 없고 최후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썰들이 있어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김형욱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이쯤에서 박정희와 관련된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서 말이죠. 앞서 말했듯 중앙정보부라는 엄청난 권한이 집중된 초월적인 집단입니다.

이 중앙정보부는 그 막중한 위치 때문에 정말로 박정희의 최측근 인사들이 그 수장을 맡았었는데요. 
주목해야 할 인물은 3명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4대 김영욱 8대 김재규입니다. 
김종필은 말할 필요도 없는 516의 주체이며 박정희와는 개인사적으로도 인척 관계였고 박정희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2인자의 삶을 살았고 김형욱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 막강한 2인자가 아니라 언제나 감시와 견제를 받고 살았던 허울 좋은 2인자였습니다.

그는 중정의 초대 부장으로 박정희에게 무한한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지만 그런 그도 박정의 뜻에 매번 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했고 유신과 유신 2기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습니다. 
그는 전부터 내각제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충복인 장세동이 변함없이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무조건 박정의 뜻을 따르진 않았습니다. 
물론 대놓고 박정희에게 대항한 적은 없었습니다.

4대 김형욱은 그 누구보다 굳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악역을 자처하며 박정희 정권을 위해 일했고 실제로 그는 가장 오랫동안 중앙정보부장직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울분으로 대놓고 그를 배신하고 박정희 정권의 치부들을 까발리는가 하면 그걸로 그치지 않고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기록한 2천 장 분량의 회고록까지 집필했습니다. 
물론 이는 박정희 정권에서는 절대적인 금소였습니다.

8대 김재균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배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정희에게 총탄을 쏜 인물입니다. 
보시다시피 박정희의 분신이랄 수 있는 김종필은 박정희의 뜻에 무조건 충성한 인물이 아니었고 김형욱은 해외로 탈출해서까지 박정희를 배신하고 자신이 충성한 일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을 갈게 됩니다. 
그리고 육사 동기이고 같은 동양 출신이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김재균은 총으로 박정희를 쏘게 되죠.

박정희가 살해되었을 때 다들 차지철이 그랬다는 말을 믿었고 설마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그가 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의 핵심 바로 중앙정보부장이었다는 겁니다. 
박정희는 가장 신임하고 믿었던 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지 못했고 또 배신을 당했으며 최후에는 자신이 임명한 중정부장의 손에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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