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하게 따아올린 머리 오밀조밀 선명한 이목구비 부드러운 몸짓까지 고운 선과 대담하고 화려한 색은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 작가의 특징입니다.
그는 이전에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미인도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려낸 단호 풍정 등을 남겼는데요.
이처럼 신윤복은 일상 속 사람들을 그렸고 특히 양반들의 방탕한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창적인 화풍은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당시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시대 분위기상 받아들이기 힘든 야한 장면들이기 때문이죠.
아내를 두고 기생을 만나는 양반 야심한 밤에 만나는 남녀 목욕하는 여자들을 훔쳐보는 승려까지 신윤복은 왜 이토록 야한 장면을 그렸을까요.
신윤복은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을 풍속화라 하는데요. 조선시대 풍속화 중에서도 그의 작품은 유독 독창적입니다.
섬세한 필체와 표현력 풍부하고 화려한 색감까지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생동감이 넘쳐서 눈앞에 있는 듯 합니다.
또한 신윤복을 풍속화의 이다나 풍속화의 선구자라 부르기도 합니다.
소재가 남다르기 때문이죠. 달빛만이 내리쬐는 한밤중 길모퉁이에서 마주친 남녀를 그린 이 작품
갖춰 입은 옷차림으로 보아 양반임을 알 수 있죠 자유 연애가 허락되지 않던 시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즐기는 은밀한 만남을 포착한 건데요.
이처럼 신윤복은 양반의 사생활을 주로 그립니다.
당시 사람들의 일상 중에서도 아주 사적인 영역 심지어 사회 분위기상 모두가 쉬쉬하던 양반의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겼죠 주로 평민의 모습을 그려낸 다른 풍속화들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신윤복이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닙니다.
생전에 남긴 뛰어난 그림과 현재의 명성에 비해 사실 신윤복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달랑 이 몇 줄의 기록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적은 기록과 그가 남긴 50여 점의 그림을 통해서만 작가의 삶을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윤복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부터 삼촌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족들은 대대로 화가로 활동했죠.
특히 신윤복의 아버지 신안평은 조선의 공식적인 그림을 담당하는 도화서의 화가였습니다.
손꼽히게 실력이 뛰어났는데요. 경험이 많은 당대 일류급 화가들만 그릴 수 있다는 왕의 초상화 어진을 그릴 정도였다.
대표작 중 하나인 단오풍정 여기선 화려한 색감과 독창적 구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의 붉고 푸른 치마는 강렬한 색감 대비를 주며 생동감을 주 왼쪽 승려는 오른쪽 여인들을 오른쪽 승려은 왼쪽 여인들을 바라보는 교차된 시선 이는 그림 전체를 긴밀하게 엮어 관람객의 집중을 끌어내죠
신윤복 그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뛰어난 채색과 명함 표현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 끄는 구도 설계까지 뛰어난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식구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연스레 아버지처럼 화원이 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수년간의 혹독한 노력을 통해 마침내 도화서 화원이 되죠.
당시 도화서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또 한 사람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 화가로 불리는 단원 김홍도죠
13살의 나이차 겹치는 활동 시기와 장소 때문에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사실 그마저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동시대에 활동한 뛰어난 화가 두 사람이 서로의 그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죠.
실제로 신윤복과 김홍도는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라의 공식적인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원이었지만 궁궐밖 사람들의 삶을 자주 그렸다는 점이 대표적이죠.
그 중 아주 비슷한 그림도 있습니다.
인물의 자세 구성이 거의 같아
성별과 들고 있는 물건이 다를 뿐입니다.
신윤복의 작품 저작길 큰 물고기를 팔러 가던 젊은 여인은 할머니와 마주쳐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은 끝날 줄 모르고 갈 길이 바쁜 여인의 마음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죠 비슷한 장면을 그린 그림과 비교하면 특유의 섬세한 표현력은 단연 눈에 띕니다.
이처럼 신윤복은 동시대 뛰어난 동료 예술가와 함께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발전시켜 갑니다.
하지만 신윤복에게 화원 생활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화서 화원들은 주로 궁궐 행사 모습이나 지도 등을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공식 자료와 같았다. 지금처럼 사진과 영상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일한 시각 자료는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즉 화원이 그린 그림은 작품이라기보단 기록이었습니다.
때문에 선 하나에도 기준이 엄격했다.
왕실과 사대부의 요청에 따라 그리는 그림 정해진 틀 안에서 그려야 하는 그림 신윤복이 화원 생활의 실증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이죠.
그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인생을요.
그는 한양 곳곳을 떠돌며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신윤복이 사람들의 일상에 다가가 그린 그림들 그 속엔 당시 사회의 모습이 가득합니다.
때문에 시대상을 생생하게 보여주죠 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양반과 기생의 유흥 남녀 간의 만남입니다.
신윤복의 그림은 유독 남녀의 성적인 순간을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야하게만 보이지는 않죠.
작가도 그저 야하게 표현하려던 건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죠. 바로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는 것 조선 후기 양반의 도를 넘은 유흥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됐습니다.
심지어 기생과 놀다 관직에서 쫓겨나는 공직자도 있었죠.
때문에 시대를 담고자 했던 신윤복의 그림에 양반과 기생이 어울려 노는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웠습니다.
대낮부터 기생과 들어놓은 젊은 양반 속옷 차림으로 모자도 팽개친 채 기생을 껴안고 풍악을 즐기는 양반까지 일과 공부는 뒷전인 채 그저 술집을 찾아 기생을 만나고 유흥을 즐기죠
사실 신윤복처럼 양반들의 풍기문란을 비판하는 그림은 쉽게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시대를 고발하고자 했던 작가만의 대담한 시도였죠.
신윤복이 비판한 건 양반의 문란한 생활 뿐만이 아닙니다.
거칠에 집착하는 가식적인 모습도 드러내고자 했죠.
배 위에 유흥을 그린 주유 청강 가운데 서 있는 양반이 눈에 띕니다.
중요한 건 하얀 허리띠 그가 상을 치르는 중이란 표시죠 심지어 상중에도 기생들과 어울리는 양반은 그저 남에게 보이는 겉모습만 신경 쓴 위선적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비와 유흥에 빠진 방탕한 양반들은 몰락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며 벼락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오랜 시간 조선을 지켜온 신분제가 허물어지고 있었죠.
이때 작가의 눈에 들어온 건 기생과 하인이었습니다.
사회 계급적으로 하위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신윤복은 이들을 주체적인 인물로 재탄생시킵니다.
거리에서 벌어진 싸움을 그린 유악쟁웅 사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기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듯 관망하는 모습에선 양반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엿보이죠.
시중 드는 하인 역시 양반들의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일처럼 익숙해 보입니다.
이처럼 신윤복 그림 속 하인과 기생은 누군가를 돕거나 보조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양반층을 비판하는 인물이죠. 익숙한 구조를 뒤집은 겁니다.
이처럼 작가는 조선의 사회 구조 계급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 던졌습니다.
마침내 신윤복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건데요. 남성과 계급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조선시대 여성과 그의 감정을 다룬 그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윤복은 달랐죠. 여인의 마음과 감정을 작품의 주제로 그려냅니다.
두 여인이 나무에 앉아 있는 이 그림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은 과부입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분명 웃고 있는데요.
그가 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짝짓기 중인 강아지죠
작가는 설레는 과부의 미묘한 마음을 절묘하게 그려냅니다.
절제된 표현을 통해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죠 하나같이 야릇한 장면을 그림 그림들이지만 등장 인물을 미워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윤복에게 예술은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주류 계층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었죠.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을 작품 전면에 등장시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작품을 통해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죠.
마침내 신윤복은 여성 그것도 기생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미인도 조선시대 여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라 불리는 수작이죠.
여성을 그린 그림은 미인도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전까지 그림에 등장한 여성들은 주로 어머니로서의 이미지 즉 모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윤복의 미인도엔 어머니가 아닌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둥근 얼굴에 단정히 빗은 머리 가느다란 눈썹과 작고 붉은 입술
붉은 저고리와 푸른 치마 그 아래로 슬며시 드러낸 속치마와 버선까지 한 사람의 여성을 화폭 전면에 걸쳐 섬세하게 그려낸 신윤복의 그림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개인으로서 여성 그 자체에 집중한 걸 알 수 있죠
옛 사람이 하지 못한 것이니 참으로 기이하다 전모를 쓴 여인에서 신윤복은 나들이 차림을 한 기생을 그리고 이런 글귀를 남겼습니다.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본인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여성에 대한 존중이었죠.
또한 신윤복의 삶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그림을 그려냈기 때문이죠.
떠돌며 풍속화를 그리던 신윤복은 1814년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사실적 풍속화도 명맥이 끊기고 말았죠.
자극적인 유흥문화를 그린 그림이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신윤복의 그림 50여 점은 그 어떤 역사적 기록보다 또렷하게 조선 후기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상상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생생하고 사실적인 장면들 이는 신윤복이 화원이라는 안정적 신분에서 벗어난 뒤 사람들의 실제 섬 속으로 들어간 덕분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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