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심장 건축계의 천재 안토니 가우디 자유롭게 곡선과 직선을 오가는 형태 스스로 자라난 듯한 건물과 장식들 안토니 가우디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정말 독특합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 도심에서도 그의 건축물은 확연히 눈에 띄기도 하는데요.
건축사에 있어서도 유례없는 새로운 도전들을 선보이며 천재임과 동시에 이단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우디는 어떻게 건축계의 이단화가 되었을까요.
가우디의 건축물은 특이합니다. 건축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가우디 이전과 이후 시대의 건축물 중에서도 유사한 건축을 찾긴 어렵죠.
직선과 곡선이 혼재돼 어딘가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 마치 나무나 식물이 자란 모습을 한 건축물이 가우디 작품의 특징인데요.
그의 이런 유별난 건축 양식은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관광객들은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고 있죠 하지만 사실 가우디가 초기부터 이런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가 대학 시절 설계한 작품들인데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우디의 대표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죠.
가오디는 1852년 금속을 다루는 주물 장인의 집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공방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돕는 경우가 많았죠.
어릴 적부터 사물의 공간과 부피를 다루는 일에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우디는 어릴 적 건강에 좋지 못했죠.
때문에 학교 대신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연의 주변 숲을 감상하고 명상하는 것을 즐겼는데요.
그는 이 시기부터 자연이야말로 창조주의 탁월한 업적이라 생각했죠.
어릴 적부터 가오디의 재능을 안 부모님은 아들을 도심지인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시킵니다.
하지만 가오디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과제를 내줄 때마다 교수들과 자주 부딪혔기 때문인데요.
그는 항상 과제를 받으면 그 부지에 가서 며칠이고 주변 경관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도안을 그렸습니다.
덕분에 과제 마감을 지키기는커녕 낙재 직전에 간신히 제출하기 일쑤였죠.
게다가 그의 도안들은 교수들이 사전에 준 가이드와는 전혀 다를 때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교수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죠.
건축학교의 교장이자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루젠트 교수는 그런 가우디를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가오디만 낙제점을 줘 졸업을 미루기까지 했죠.
그도 그럴 것이 가오디는 로젠트의 수업 중 교수님 설계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우디는 골치 아픈 학생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졸업하는 날 교장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괴짜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그러자 가우디는 이렇게 답했죠.
도시에 올라온 시절 가오디는 당시 건축가들에겐 필수적이었던 세계 여행은 커녕 건축 도서를 사볼 돈도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학교 도서관에 살다시피 했죠.
가오디는 책을 통해 세계의 건축 양식을 접했습니다.
인도 이집트 로마 등 수세기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위대한 건축 걸작들을 탐독했죠.
그러면서 그는 건물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을 탐구합니다.
가오디는 건축가란 단순히 설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건축가만의 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를 위해 그는 건축학교에서 제공하지 않는 철학과 미학 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학교에 가서 청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순간엔 생계를 위해 설계 현장으로 나가 일을 했죠.
하지만 이러한 일은 반대로 가우디에게 중요한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건축 거장이었던 폰사라의 제도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요.
덕분에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실무에 바로 적용시켜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식공예 거장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며 실무를 익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대학 졸업 후 가우디는 개인 사무실을 여는데요.
주변 작은 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일하기 시작합니다.
건축 설계뿐 아니라 소품부터 가구까지 자신의 창작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죠.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가로등 기둥이나 신문 가판대 등 다양한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때마침 1878년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는데요.
이 시기 가우디는 한 장갑 공장의 의뢰를 받아 장갑 진열대를 만들어 출품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열대로부터 감명받은 한 사람이 가우디를 직접 찾게 되는데요.
바로 구에리였죠.
구엘은 당시 바르셀로나 최고의 부자로 뛰어난 예술 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전도 유망한 신진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죠.
가우디의 장식품은 그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된 가우디에게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구엘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가우디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신예 건축가 학교와도 좋은 관계가 아닌 그가 이를 따올 인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가오디는 구애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에게 작은 가구부터 의뢰를 받기 시작하고 점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합니다.
약국 등대
개인 저택 등 닥치지 않고 일을 받았죠.
그런 그가 가장 처음으로 자신의 건축 도안대로 완성한 데뷔작은 카사 비센스입니다.
가우디가 31살이 됐을 때부터 짓기 시작한 건물인데요.
타일 공장을 운영하는 비센스의 여름 별장이었죠.
이 건물을 보자마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기하학적인 장식 구조와 청록색 타일들일 텐데요.
가우디는 처음 부지에 도착해서 돼지 위에 자란 커다란 야자수와 노란 금전화가 만발해 있음을 발견하죠.
그리고 이 생명들을 자신의 건축에 그대로 반영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집을 둘러싼 철책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야자수 입사기와 금자나의 꽃봉우리가 모티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둘러싼 붉은 벽은 대지를 상징하고 타일 위에 금전화를 그려 넣어 자연을 투영하려고 했죠.
이는 전례 없던 시도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건축에 있어선 안정과 균형을 중시했는데요.
때문에 색이나 장식은 제한적으로 활용되곤 했죠.
하지만 장식을 전면에 내세운 가우디의 건축물은 한눈에 봐도 독특하고 새로웠습니다.
휘황찬란한 가우디의 데뷔작은 곧 명성을 얻게 됩니다.
유명세를 얻은 가오디는 이후로도 여러 의뢰를 받아 건축물들을 만듭니다.
여전히 그는 자연이 녹아드는 건축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친환경적인 형태로 발전했죠.
그가 이 시기 건축한 여름 별장은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동쪽에 침실을 배치하고 해외 동선에 따라 거실과 식당 등 일과가 따라가는 모양새로 설계되었습니다.
자연 속에 공생하는 건축을 만든 것이죠.
이후로 가우디는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으로 손꼽히는 구엘 공원 해골의 집으로 불리는 카스 바트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까사밀라 모두 이 식이 만들어졌죠.
가장 근원적인 자연으로부터 영감받아 만들어진 건물들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환상적인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모자이크처럼 붙여진 벽면의 타일은 직선과 곡선을 오가는 가우디의 건축을 훨씬 새롭게 만들었죠.
가오디는 외관뿐만 아니라 기능 또한 중시했는데요.
실제 사람을 그 공간에 배치하고 앉혀보기도 하며 각도와 무게를 계산해 가장 안락한 구성을 찾았습니다.
천재적인 건축 감각과 치밀한 계산을 통해 가오디는 끊임없이 건축과 자연의 공존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언제나 자연이었죠.
그 어떤 건물도 산보다 견고할 수 없었고 벌집보다 경제적인 구조를 띠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무나 뼈 힘줄의 형태를 참고하여 자연 구조의 본질을 건축과도 접목하기에 이릅니다.
노년에 접어든 가우디는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성 가족 성당으로 결정합니다.
사실 이 성당은 가우디가 이미 31살 때부터 맡은 프로젝트였는데요.
하지만 자금 조달 문제로 계속해서 공사가 늦춰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 이 성당의 설계를 맡았을 때 이미 다른 건축가에 의해 20년 정도 공사가 이뤄진 후였는데요.
가우디는 기존의 계획을 과감하게 모두 허물어버립니다.
성당 전체를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 만들기 위해 그가 수년간 쌓아온 건축 지식을 총동원합니다.
그는 이때에도 자연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건축물의 가장 큰 적은 중력인데요. 중력을 조금만 잘못 계산해도 건물이 무너져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우디는 이 중력의 힘을 활용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구조를 고안합니다.
실의 끝과 끝을 각각 매달고 가운데 줄을 달면 중력에 의해 실은 유자 형태를 띠며 쳐지게 되는데요.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실들을 연결하고 또 추를 매달면 실은 점점 더 탄력을 받아 장력이 튼튼한 구조가 되는 것이죠.
이 형태를 그대로 뒤집어 아래를 위로 가게 하면 중력이 만든 가장 견고한 형태의 아치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를 그대로 성 가족 성당의 구조에 적용한 것이죠.
이렇게 자연의 형태를 모방할 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활용해 자연을 담게 할 수 있는 것은 가우디만의 빛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하지만 성당을 최고의 걸작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꼽히지 못하죠.
작업을 마친 가우디는 달려오던 전차에 치여 크게 다치게 됩니다.
하지만 작업 후 행색이 남루했던 그를 가오디라 알아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길에 쓰러진 노인을 본 사람들은 병원으로 옮기고자 택시를 불렀으나 볼품 없는 차림새임 덕에 여러 번 승차 거부를 당하게 되죠.
겨우 병원에 도착했지만 병원에서도 여러 차례 남루한 노인의 입실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열악한 치료 시설에 남겨지게 됐죠.
다음 날 늘 칼같이 작업장에 도착하던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성당 관계자들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가우디는 응급실 구석에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상태가 너무 악화된 이후였죠.
건축계의 이단아이자 천재였던 그는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스페인의 국민들은 슬픔에 빠졌죠.
가우디는 한 평생 도전적인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전에는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양식과 실험을 계속했죠.
세상은 여전히 그의 도전과 철학에 영감을 받고 그의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성 가족 성당은 그의 작업을 계승하는 후손 예술가들에 의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2026년에 완공이 될 예정인데요.
현재까지 그의 건축물들은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분위기로 사랑받으며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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