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황금의 화가 화려한 색감과 유려한 선 그리고 매혹적인 피사체 19세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56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회화 벽화 스케치 등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도 또 그 이후 시대의 그림들과도 선명히 구분되며 자신만의 개성을 선보이고 있죠
클림트의 작품들은 특유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으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 바우어의 초상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고 굿즈를 비롯 현재까지도 다양한 대중매체와 산업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죠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클림트의 유명 작품들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여기도 여기도 클림트의 작품 속엔 황금색이 가득하죠.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틀부터 작품의 세세한 부분 부분까지 화려한 색채와 선들과 어우러져 황금색은 고급스럽고 신비한 느낌을 전해주는데요.
그렇다면 클림트는 왜 작품 속에 황금색을 사용했을까요.
클림트의 작품은 정말 화려합니다. 눈을 사로잡는 색감과 자유로운 선까지 작품 속 관능적인 느낌과 함께 그림의 요소 요소들은 플림트의 작품을 더욱더 독특하게 만듭니다.
클림트의 작품을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 중 또 대표적인 것은 바로 황금인데요.
클림트의 대표 작품들을 비롯 수많은 작품 속에서 클림트의 황금빛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클림트는 작품을 할 때 유화 기법과 함께 금박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짜 황금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실제로 값비싼 금박을 활용했습니다.
때문에 클림트의 작품은 재료값부터 만만치 않았죠.
하지만 클림트가 처음부터 이런 값비싼 재료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요.
아주 궁핍한 삶을 살았죠. 클림트의 아버지는 귀금속을 다루는 세공업자였습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는데요.
더군다나 클림트의 형제는 7명이나 됐습니다.
클림트는 그 중 둘째였죠. 어렸을 적부터 클림트는 아버지의 수공의 품을 보며 자랐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세세한 디테일 이는 어린 시절 클림트에게 큰 영감이 됐는데요.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예술가를 꿈꾸는 계기가 됩니다.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 재정적인 문제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클림트의 재능을 알아본 친척의 도움으로 비엔나 국립 응용미술학교에 진학하게 되죠.
응용미술이란 순수한 작품을 만드는 학문이라기보다 예술적인 요소들을 제품이나 장식 등 실용적인 분야에 접목시키는 학문입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자 응용미술을 시작했죠.
그러면서 장식 회화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하는데요.
고대 이집트의 벽화나 모자이크 기법들을 익히며 클림트는 자신만의 장식 기법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던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친구와 함께 적극적으로 일감을 찾습니다.
주로 벽화를 그리는 일을 많이 했죠.
클림티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10대 소년의 벽화 그림에 매료됐죠
급기야 18이라는 어린 나이에 빈 역사박물관의 장식을 맞는 큰일을 해내기도 하죠.
이 시기부터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에서 뛰어난 건축 장식가로 손꼽히게 됩니다.
초기 그의 건축 장식들을 살펴보면 기존의 고전 미술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대를 주름잡던 낭만적인 화풍과 고대 벽화의 느낌이 혼재돼 있죠 장식 건축가로 입지를 다진 그는 자신의 그림을 대중에게 선보이기도 하며 오스트리아 미술가들 사이 인기를 얻게 됩니다.
1892년 성공 가도를 달리던 클림트의 삶에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몇 달 후 예술적 동지이자 동생이었던 에렌스트가 독감으로 인해 세상을 떠납니다.
클림트는 한순간에 가장 가까웠던 가족들을 떠나보냈죠.
클림트는 깊은 상실감에 빠집니다. 이후 약 3년 동안 작품 활동을 접는데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클림트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클림트는 삶과 인간 내면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죠.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1895년이 되어서야 클림트는 다시 작품을 내놓기 시작하는데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 속에 삶과 죽음의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죠.
클림트는 이 시기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 갔습니다.
대상을 묘사하고 낭만적으로 그렸던 기존의 화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기 시작하죠.
이 시기부터 클림트는 작품 속에 상징적인 요소들을 담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세상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요소 요소 안에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담았죠.
클림트는 예술을 통해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클림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은유의 이미지들이 자리 잡고 있죠 사람들은 이 시기부터 클림트가 작품 속에 다양한 상징물들을 활용하는 상징주의를 받아들였다.
평가합니다.
플린트가 새로운 화풍으로 등장하자 당시 미술계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의 새로운 도전을 반기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주류 미술계는 보수적이었습니다.
때문에 클림트의 변화를 탐탁치 않아했죠.
클림트는 이 시기 자신의 작품이 오스트리아 주류 미술계의 전시에서 출품을 거부당하는 일들을 겪는데요.
이에 차츰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1894년 클림트와 친구들은 비엔나 대학에 벽화를 그리는 것을 제안받는데요.
당시 대학의 4대 학문으로 여겨지던 신학 의학 철학 법학 중 의학 철학 법학 세 가지의 주제를 담아내는 벽화였죠.
당시 작품 활동을 실고 있던 클림트는 2년이 지나서야 벽화의 스케치를 먼저 전달합니다.
하지만 스케치가 공개되자 작품은 수많은 혹평을 받죠.
대학은 4대 학문을 주제로 벽화를 그림으로써 학문의 위대함과 인간의 가능성을 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 작품 속 인간은 어딘가 나약해 보였죠.
각각의 학문을 주제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삶의 굴레 속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죠.
결국 학교와 클림트는 갈등을 빚었고 기나긴 공방 끝에 작품은 벽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을 전후하여 클림트는 주류 미술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1897년 당시 마음이 맞던 신진 화가들과 함께 빈 미술가 협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데요.
바로 빈 분리파였죠.
총 19명의 예술가가 모였고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빈 분리파는 말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의 주류 예술로부터 분리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존의 기관이나 아카데미 중심의 전시로부터 벗어나겠다는 포부를 나타냈죠.
빈 분리파는 잡지를 참관하며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틀에 박힌 예술의 선전 포고를 한다 플린트는 첫 전시회 포스터를 제작했는데요.
포스터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여신 아테네의 보호 아래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테세우스는 블리파를 미노타우로 쓰는 기존의 보수적인 예술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죠.
빈 블리파의 첫 전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5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고 유명세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황제까지 방문했죠.
클린트를 비롯한 신진 예술가들은 당시 주류 예술에 큰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 당시 불리파가 발간한 잡지 속에서는 클림트의 예술적 고민들도 마주할 수 있는데요.
클림트는 관능미를 탐구하며 나체를 많이 그렸습니다.
어딘가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유려한 인물들의 나체를 그렸죠.
이는 삶의 거대한 굴레 속에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더불어 당시 주류 예술의 검열로 인해 자유로운 표현을 하지 못했던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했죠.
클렌트의 모델은 대부분 여성이었는데요.
클렌트는 순수한 관능을 탐구하며 작품 속에 에로틱한 무드를 그려내고 싶어 했습니다.
실제로 클림트는 모델이었던 여인들과 사랑에 빠져 육체적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죠.
클림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클림트가 느꼈던 관능미를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림 속 피사체로부터 매혹적인 느낌이 풍기죠 클린트는 관능미야말로 순수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작품 속에 담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클림트의 이런 도전을 퇴폐적이라 비판했지만 클림트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화풍을 부축해 갔습니다.
클림트를 필두로 한 빈 분리파의 활동은 매 순간 화두에 올랐고 비판과 함께 찬사를 받으며 크게 성장해 갔습니다.
자신들만의 전시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해 후원하기도 했죠.
실제로 에곤 실레 코코슈카 같은 예술가들도 필림트와 블리파의 후원을 받아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1905년 클린트는 돌연 분리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벽화를 비롯한 공공 작품들을 더 이상 오래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개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죠.
이 시기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접했던 고전 벽화의 양식과 자신이 장식 건축화로 구축해온 예술적 방향성 그리고 관능을 통해 추구한 순수한 아름다움 모두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부터 클림트의 걸작들이 탄생하죠.
화려한 색감과 관능적인 피사체 그리고 평면과 입체감이 뒤섞인 그림 더불어 황금 금박이 어우러지며 크림트의 작품은 고귀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풍겼습니다.
플린트는 이 당시 환의와 매혹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요.
단순히 작품 속에 그러한 소재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감정이 느껴지길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작품 자체에 매혹되고 또 환희를 느끼길 바랐죠.
때문에 클림트는 그림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황금 금박을 활용해 작품이 그 자체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죠.
사람들은 이 시기를 클림트의 황금시대라 불렀습니다.
1907년 그려진 키스는 이러한 클림트의 고민이 담겨진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키스 하는 연인의 모습을 통해 클림트는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입맞춤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사랑의 기억은 마치 영원하게 이어질 것만 같죠.
키스로부터 펼쳐지는 사랑의 고결함과 찬란함을 클림트는 황금을 통해 표현하려 했습니다.
삶에 있어 가장 화려한 순간 가장 짜릿하면서도 잊지 않고 싶은 순간 클림트는 이 순간을 황금의 빛으로 채웠습니다.
클림트는 이후로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많은 여인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고 주변 풍경을 그려나가기도 했죠.
주변에서는 퇴폐적인 예술가라 조롱하기도 했지만 클림트는 자신만의 화평을 구축하며 그림 속에 자신의 가치관을 담아냈습니다.
1916년 그려진 죽음과 삶은 8년에 걸쳐 탄생한 작품입니다.
탄생과 함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대비되며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냈죠.
20세기 초는 식민지 쟁탈을 비롯한 전쟁의 위협과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전염병의 창궐로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클림트는 삶의 가치에 물음을 던지며 지속해서 그림을 만들었죠.
191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클림트는 이내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정신적 동반자이자 평생의 모델이었던 에밀리 플리게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뒀다.
전해집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영원한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클림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즐기며 클림트가 담아냈던 감정과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알아두면 유용한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 석가모니가 정의한 약한 사람과 강한사람의 차이 (0) | 2022.06.08 |
---|---|
사망보험금을 노린 일본의 투구꽃 복어독 살인사건 (0) | 2022.04.28 |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에 대하여 (0) | 2022.04.25 |
신윤복이 여성과 음란한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 (0) | 2022.04.25 |
주세페 아르침볼도 과일로 얼굴을 그리다 (0) | 2022.04.21 |
댓글